[아침을 열며]강우방/잃어버린 고독을 찾아서

  • 입력 1999년 8월 22일 19시 00분


헬렌 켈러는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며 듣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사람의 영혼과 영혼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그리고 내가 만지는 것마다 생명이 있어서 약동하는 듯 느낀다’라고 술회했다. 그러면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헬렌 켈러는 절대(絶對)의 고독속에서 영혼의 꽃이 피어나 모든 사물과 ‘관계’를 맺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바쁜 세상이 앗아간 것▼

고독 속에서 비로소 사물을 관찰할 수 있고 깊은 사유에 몰입할 수 있다. 무릇 위대한 것은 고독 속에서 탄생된다. 생명이라 해도 좋고 신(神)이라 해도 좋은 것이 내재해 있는 예술 작품도 고독의 산물이다. 영감을 받는 것은 오직 고독한 상태에서 뿐이다.

그러나 현대의 급변하는 세계와 홍수처럼 밀려드는 정보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독’을 지닐 틈도 없으니 단어 조차도 점점 낯설어지고 있다. 사치스럽다고 할지 모른다. 이미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눈으로 보아도 올바로 보지 못하고, 들을 수 있으되 올바로 듣지 못하고, 말할 수 있으되 올바로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헬렌 켈러가 조용히 술회하는 영혼과 영혼을 이어주는 실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이곳의 물리적 힘은 지구 저편에 즉각 작용한다는 만유인력의 진리를 넘어서서, 그녀는 마음의 작용도 거리에 관계없이 널리 미치고 있음을 깨달았으니 종교적 경지에 이른 셈이다.

학문이란 고독한 작업이다. 예술은 더더욱 그러하다. 미술을 학문적으로 다루는 미술사학(美術史學)이란 분야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여길지 모르나, 실제로 유전공학이나 물리학만큼 일반 대중에게는 낯선 것이며 이해하기 어렵다. 심층적으로 다룬 논문은 이 지구상에서 기껏해야 열 손가락을 헤아리는 학자들에 읽힐는지….

그래서 논문들을 되도록 일상용어로 바꾸며 어려운 내용을 쉽게 표현하여 대중에게로 다가서려고 애를 쓴다. 그런 뜻에서 나는 작품에 내재해 있는 신(神)에 응답해 한국미술에 대한 수상록을 두 권 펴낸바 있다. 논문은 몇몇의 학자들을 염두에 두고 쓰지만 수상록은 모든 분야의 사람들은 물론 ‘나’를 생각하며 고독한 내밀과 교감의 세계에서 써야되니 진실에 대한 책임은 몇 배 크다.

요즈음은 국민계몽을 위하여 가능한한 일반인의 요청에 응하여 강연도 자주하는 편이다. 수상록을 쓰거나 강연을 하는 까닭은 내가 그동안 고독 속에서 연구하여 밝힌 새로운 사실과 해석, 그리고 그랬을 때 느낀 희열을 일반 대중과 함께 나누기 위함이다. 진리를 이야기하는 성직자처럼, 나는 미(美)의 진리를 전도해야 한다.

▼학문과 예술의 모태▼

그러나 강연을 하고 수상록을 펴낼 때 마다 대중 속에서 나는 심한 외로움을 느낀다. 고독의 산물인 예술에 숨겨져 있는 진리가 잘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요즈음에야 나는 그 까닭을 알아차리게 됐다. 고독을 잃은 탓이란 것을. 고독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찰과 사유를 경험하여 끊임없이 축적하지 않았으니 갑자기 본질적인 것을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본 적 없지만 느닷없이 가느다란 전선(電線)을 타고 오는 목소리가 있다. 그것은 부산에서도 오고 광주에서 그리고 원주나 목포에서도 오고 서울로부터도 온다. 나의 수상록을 읽은 그들은 대학원생 주부 스님 예술가들이다. 이 광막한 우주에서 가느다란 선(線)을 타고 오는 응답의 목소리는 고독한 시간을 보내는 나에게 나의 존재가 지구상의 모든 사물과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緣起)의 진리를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신(神)의 응답이라 여기고 있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내 주변의 가까운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먼 곳으로부터 온다. 영혼과 영혼이 만날 때, 생명과 생명이 만날 때의 떨림을 때때로 감지한다. 영혼과 생명은 하나다.

나는 확신한다. 고독을 체험한 사람만이 위대한 예술을 체험할 수 있고, 상대가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함을 느낄 것이다. 고독이란, 죽음의 인식이다.

강우방(국립경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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