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김용택/아이들아 지금 뭐하니

  • 입력 1999년 8월 8일 18시 26분


교사가 아닌 사람들이 이 글을 보면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방학을 하면 나는 갑자기 심심해져서 며칠간 어쩔 줄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오늘부터 방학이라고 생각하면 갑자기 하루가 아득해지고 내일이 걱정이고 모레가 걱정이 된다. 그냥 허둥대고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방학한 지 사흘도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궁금해져서 1학년 창우에게 전화를 한다. “창우야, 지금 뭐 해. 일기는 썼어?”하고 물으니,“근데요 선생님, 우리 강아지 세 마리가 죽으려고 해요.” “큰일 났네, 어떻게 해?” 지금 아버지가 돌보고 있단다. 나는 일기가 또 궁금해서 “근데 창우야, 일기 썼어?” “근데요 선생님 우리 집 큰 개도 죽으려고 해요.” 창우는 끝내 일기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한다. 나는 다시 같은 반 다희네 집으로 전화를 한다. 다희는 외갓집에 갔단다. 6학년 귀봉이네 집에 전화를 한다. 귀봉이는 오늘 개집에 쌓인 오물을 치웠단다. 빨리 오물을 치우고 앞강에서 낚시질을 해야지 하며, 땀을 뻘뻘 흘리는 귀봉이 모습이 훤하게 떠오른다. 소희에게 전화를 했더니, 소희는 오늘 바람으로 쓰러진 고추밭에서 일을 했단다. 그 야무진 모습으로 이마에 땀을 훔치며, 매운 코를 훌쩍이며 고추를 따는 소희의 힘겨운 모습이 보인다. 초이에게 전화를 했다. 초이는 요즘 양계장에서 일을 한단다. 날씨가 너무 더워 닭들이 더러 죽기도 하므로 닭장에서 닭들을 돌보는 모양이다. 우리 반 1학년 2명, 6학년 3명에게 전화를 다 하고 나니 그나마 오늘은 무슨 일인가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스물두살의 머리털이 새까만 청년에 교사생활을 시작해 올해로 꼬박 스물아홉해를 코 흘리개 아이들 곁을 한번도 떠나보지 않고 지냈다. 생각하면 참으로 긴 세월인데, 순식간에 지나버린 세월 같기도 하다. 눈만 뜨면 늘 내 곁에는 머리통이 까만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습관이나 버릇처럼 그냥 지나쳐가는 소리가 아니길 바랐다. 아이들의 모습과 떠드는 소리가 늘 새로운 소리로 내 귓가에 와 닿기를 바라면서 살았다.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평생을 강과 산과 아이들을 바라보고 살았지만 나는 그 풍경에 한번도 질린 적이 없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서서 아이들을 바라보면 아이들의 손짓발짓 얼굴표정들, 뛰고 달리고 싸우며 울고 웃는 모습들이 어찌 그리 예쁜지 모른다. 모두 각양각색의 저 몸짓들은 운동장과 산과 강에, 그리고 내 마음속에 온갖 그림을 다 그려내곤 한다. 나는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보며 사람이 꽃보다 예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우리 학교 운동장 언덕에 봄부터 가을 끝까지 저절로 피어나는 수많은 풀꽃들처럼 아이들의 모습이 늘 생기 넘치고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이제 꼼짝없이 아이들에게 매인 몸이 되었다.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아이들 곁에서 아이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지낸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자다가도 돌아누우며 내 삶이 행복한 삶임을깨닫는다. 어떤일이있더라도 아이들과 학교 운동장을 생각하면 남은 내생에아무여한이 없는 사람처럼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이다. 어느날 귀봉이가 선생님이라는 시를 써왔다.

여름이지만/선생님 머리에는/눈이 왔다.//눈을 치우고 싶지만//못 치운다./나이 때문이다.

아이들이 내게서 이렇게 자라는데 내가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지금 학교는 뭣할까. 아이들이 없는 운동장엔 드문드문 풀들이 자랐겠지? 철봉은 얼마나 심심하고, 축구 골대는 얼마나 아이들을 기다릴까. 운동장가에 천인국은 비와 바람에 견디었는지. 하얀 개망초꽃은 다 졌겠지? 학교 둘레 밭에 고구마는 더 자랐고, 옥수수는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겠지. 학교 뒤꼍 도랑에 맹꽁이 올챙이는 발이 다 생겼을 거야. 다람쥐는 제 마음대로 학교를 돌아다니겠지. 마암분교야, 나는 방학동안 내내 영어 강습을 받는단다.그런데 학교야, 아이들아 지금 뭐 하니? 나 지금 진짜로 우리 학교에 가고 싶단다.

김용택<시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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