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이어령/어느 달이 크게 보이는가

  • 입력 1997년 9월 28일 20시 25분


일년 중에 달이 가장 크고 밝은 때가 언제냐고 물어보면 누구나 다 한가위 보름달이라고 말할 것이다. 바로 얼마전 추석을 쇠고 왔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관측해보면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현대 과학자들의 보고이기 때문에 양력으로 되어 있기는 하나 일년 중 달이 가장 크게 보이는 것은 4월이고 가장 작게 보이는 것이 12월이라고 한다. 그것도 그냥 작게 보인다가 아니라 80%라는 수치까지 나와 있으니 믿을 수밖에 없다. ▼ 엄연히 다른 느낌과 실체 ▼ 그런데도 우리가 팔월 보름달을 가장 큰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그 기분 때문이다. 무더위가 가신 추석 저녁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청풍(淸風)에는 명월(明月)이 대구를 이루게 마련이다. 거기에 또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배부르고 한가로운 마음 속에서 달이 뜬다. 어찌 그 달이 맷방석만큼 크게 보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허구요 이미지이다. 느낌과 실체, 주관과 객관의 세계는 엄연히 다르다. 추석 달을 가장 큰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꼭 강가에 사는 사람들이 기분이 좋으면 강물을 푸른 물이라고 하고 기분이 나쁘면 흙탕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기분은 냉철한 관찰력과 분석력을 흐리게 하여 사태를 잘못 판단하게 하는 수가 많다. 천하의 아리스토텔레스도 고래를 물고기라고 생각한 오류를 범하지 않았던가. 추석 달을 제일 큰 것으로 믿는 것은 별로 해로울 것이 없다. 잘 하면 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선거가 기분과 느낌과 이미지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그것은 낭만이 아니라 비극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에 사절로 갔던 황윤길(黃允吉)은 일본이 침공해 올 것이라고 했고 김성일(金誠一)은 결코 쳐들어 올리 없다고 주장했다. 서로 다른 의견이었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그들이 모두 풍신수길의 겉 인상만을 보고 내린 결론이라는 점이다. 거기에 동인이 흑이라고 하면 서인은 백이라고 맞서던 파쟁(派爭)의 감정까지 얽혀 있었다. 그러나 서장관(書狀官)으로 이들과 함께 갔던 허성(許筬)만은 동인이면서도 같은 동인인 김성일과는 달리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왜병이 침공해 올 것이라는 소신을 폈다. 지금 대통령 후보자들이 정책대결을 벌이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은 후보자들에게가 아니라 유권자에게 주문해야 할 사항이다. 이성보다는 감성에, 논리보다는 느낌에, 그리고 뿌리보다는 이파리에, 한마디로 말해서 정책보다는 감각적인 가십거리에 더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선거는 그런 쪽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 기분에 맡길수 없는 大選 ▼ 탤런트처럼 분장하고 개그맨처럼 동어반복을 하는 텔레비전 속의 후보자들보다도 정말 알고 싶은 것은 대중처럼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요 그 눈 높이이다.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이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인지, 아니면 「생각하는 갈대」인지부터 선택해야 한다. 이순신장군과 같은 영웅은 천만명 가운데 하나가 나오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허성과 같은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전국민이 다 그와 같이 될 수가 있다. 지금은 임란같은 국난을 앞에 둔 중대한 시기이다. 어느 달이 제일 큰가, 달 고르듯이 기분에 맡길 일이 아니다. 이어령<이화여대 석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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