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생존을 포기한 순간 한국해경이 다가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8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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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볼라벤’이 강타하면서 좌초한 중국 어선 기관장 장빙좡 씨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뒤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하루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길 기다리고 있다.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태풍 ‘볼라벤’이 강타하면서 좌초한 중국 어선 기관장 장빙좡 씨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뒤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하루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길 기다리고 있다.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주워(救我), 주워.”

살려달라고 애타게 소리쳤다. 쓰러진 배의 선실 유리창에 얼굴을 내밀고 멀리 보이는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28일 오전 11시경. 해경 구조대원들이 나타났다. ‘아, 이제 살았구나.’

태풍 ‘볼라벤’이 닥치는데도 항구에 정박하기를 거부한 채 제주 서귀포 앞바다에 떠있다 끝내 좌초한 중국 어선들 내부에선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29일 오전 9시 제주 제주시 한라병원 병실. 전날 좌초된 중국 산둥(山東) 성 웨이하이(威海) 시 선적 웨장청위(월江城漁) 91104호에 타고 있던 기관장 장빙좡(張丙狀·45) 씨는 여전히 죽음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한 표정이었다. 91104호는 91105호와 함께 27일 오전 11시경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항 남동쪽 1.8km 해상에 닻을 내렸다.

기관실을 점검하고 동료 선원들과 마작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만두로 허기를 달랬다. 선실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이 오후 7시경부터 파도가 심상치 않았다. 산더미처럼 밀려오는 파도가 연신 배를 때렸다. 조타실 문짝이 날아가고 탁구공 굵기의 밧줄이 뚝뚝 끊어졌다. 파도의 기세는 멈출 줄 몰랐다. 기관실에서 바닷물을 빼내려 배수기계를 돌려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혼자 선실로 돌아가 침대 난간을 붙잡았다. 8∼12m의 파도가 내는 굉음 때문에 배가 해안 바위에 부닥쳤는지, 두 동강이 났는지조차 몰랐다. ‘이렇게 죽는구나’라며 체념했다.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아내(45), 딸(20)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게 있기를 몇 시간. 요동이 잦아들었다. 바닷물도 점차 빠졌다. 선실 유리창으로 얼굴을 내밀어 밖을 내다보는 순간 파도가 다시 배를 때렸다. 허리에 심한 통증이 전해지고 오른쪽 눈 위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날이 밝아오면서 구조대가 배를 발견해 장 씨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날 중국 어선들은 북한 함흥 앞바다에서 오징어를 잡고 돌아가다 태풍을 만났다. 주제주 중국총영사관 측은 “본국에 확인해 보니 어선등록을 했다고 한다”며 “어선을 구매한 뒤 등록변경 처리를 하지 않아 등록이 안 된 것처럼 혼선이 생겼다”고 밝혔다.

중국 당국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이 배가 대피를 권유한 해경의 무선통신에 답하지 않은 채 화순항 외곽에 정박해 있었던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2척의 통제권한을 갖고 있는 91104호 선장 장신주(張新株·40) 씨가 사망해 경위 파악이 더 힘든 상황이다. 18명은 구조됐지만 8명은 사망하고 7명은 실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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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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