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심칼럼]미래가 없는 정치

  • 입력 1999년 1월 12일 19시 18분


토머스 헨리 헉슬리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두고 말했다. “안다는 것은 유한하고 모르는 것은 무한하다. 우리는 지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한대한 대양 속의 작은 섬 위에 서 있다. 우리들 각 세대의 과업은 바다를 조금씩 더 매립하여 우리들의 영토에다 땅을 얼마씩 더 보태는 것이다.” 그 열렬한 진화론의 선구자조차 인간 지식의 유한함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세기말(世紀末)은 불안하다. 헉슬리와 다윈이 살았던 19세기의 세기말도 그랬다. 우울과 혼란 퇴폐가 잿빛처럼 세계를 뒤덮었다. 다가올 새 세기에 대한 그림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미래에 내가 서 있을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또 하나의 세기말인 20세기 말 오늘도 그렇다. 바로 한발짝 눈앞으로 다가온 21세기에 대한 그림이 없다. 내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19세기말에 이어 20세기 말에 다시 한번 세계화의 격랑 속에 내던져진 우리의 앞날은 더욱 불안하다. 21세기가 정보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좀 추상적인 예측만 해도 그렇다. 그 ‘정보화’가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꿔 놓을 것인지를보여주는그림이 없다. 21세기에는20세기오늘의우리가일군산업사회와국민국가는 과연쓸모없는폐기물이 되고 마는가.그렇다면오늘 우리의 삶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세계화 또한 그렇다. 신자유주의라는 ‘탐욕의 이데올로기’가 벌이는 세계제패 행진은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그 장래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무한하다면 그 ‘강요된 질서’에 편입될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떻게 바뀔 것이고, 유한하다면 그 뒤를 이을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학습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인가. 21세기가 우리에게 행운의 세기가 될지 재앙의 세기가 될지 우리는 모른다. 21세기는 그렇게 두렵게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이 세기말의 두려움을 확인하고 증폭하기라도 하듯 우리의 1000년대 끝해 1999년은 ‘529호실 사태’라는 전대미문의 혼란으로 날이 밝았다. 그리고 정치는 이내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불안으로 치닫고 있다. 야당 총재는 ‘죽겠다’고 결의를 불태웠고 여당측은 죽겠다면 죽어라는듯이 ‘마이 웨이’를 외쳤다. 날치기, 여야 극한대립, 청문회 갈등, 정계개편론과 합당론, 안으로 타는 내각제 불씨, 어느것 하나 앞날을 점칠 수 없다.

만약 우리의 정치인들에게 21세기 나라의 모습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 좋겠는가를 숙고하고 고뇌하는 자세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런 불안한 사태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인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국가의 개혁과 쇄신에 대한 진지한 합의를 모색하면서 날을 지새도 모자랄 때다. IMF를 넘어서는 대안을 정치가 앞장서서 내놓아야 할 때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날이면 날마다 패싸움이다.

백보를 양보해서 529호실 난입이 ‘정치사찰’을 고발하기 위한 최후의 선택이었다고 치자. 또 날치기가 ‘민생’을 돌보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었다고 치자. 여야가 서로 ‘승리’를 자축한 그런 비민주적 절차들의 감행이 민주화에 어떤 도움을 주고 세계화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야당의 무책임한 행위들은 야당이기 때문에 그렇다 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내세우는 여당의 뒷걸음질은 무엇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릇이큰정치,앞을 내다보는 정치를 보고 싶다. 여당과 야당이변화에대한가치관의 차이, 개혁에 대한 비전의 차이 때문에 격렬한 대립을 보인다면얼마나마음든든하겠는가. 정계개편도 내각제 개헌도 그렇다. 출발점은 21세기 바람직한 국가상에 대한 고려여야 한다. 동서화합 또한 같다. 단순한 정파이익이나 권력유지를 위한 술수여서는 미래가 없다.

가뜩이나 두려운 세기말에 정치가 이래서는 안된다. 불확실한 미래를 개척해나갈 가능성의 좌표를 모색하는 정치가 돼야 한다. 미래는 무한대로 열려 있는, 고뇌하고 도전하는 영역이다. 특히 IMF좌절을 딛고 재기를 꿈꾸는 우리에게는 미래를 주체적으로 만들어 나가야 할 소명이 주어져 있다. 이 모색을 정치가 가로막아서는 안된다. 21세기의 세계와 국가를 화두에 올려야 한다. 정치인들은 그 기준에서 정치를 풀어나가야 한다.

김종심〈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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