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新명인열전]종이우산 만들기 50년… “이젠 인테리어 소품으로 팔려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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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전주 ‘지우산 장인’ 윤규상씨

종이우산은 한 개를 만드는 데 80여 차례나 손이 갈 만큼 오랜 공력의 산물이다. 미적으로도 뛰어나 인테리어 소재로도 쓰인다. 윤규상 씨의 손에는 대나무에 찔린 상처들이 굳은살처럼 박여 있다. 그의 꿈은 비 오는 날 거리에서 종이우산을 받쳐 든 사람들을 다시 보는 것이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종이우산은 한 개를 만드는 데 80여 차례나 손이 갈 만큼 오랜 공력의 산물이다. 미적으로도 뛰어나 인테리어 소재로도 쓰인다. 윤규상 씨의 손에는 대나무에 찔린 상처들이 굳은살처럼 박여 있다. 그의 꿈은 비 오는 날 거리에서 종이우산을 받쳐 든 사람들을 다시 보는 것이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기름 먹인 종이 위로 ‘또르르’ 구르는 빗물, 합죽선처럼 접힌 한지가 한꺼번에 펴질 때 나는 소리, 오래된 들기름 냄새….

50대 이상이라면 대부분 어린 시절 종이우산에 얽힌 추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대나무 살에 기름 먹인 한지를 붙인 누런 종이우산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비 오는 날 거리의 대표적 풍경을 이뤘고, 어느 집에나 몇 개씩은 굴러다니던 물건이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종이우산은 우리 주변에서 사라졌다. 아마 비닐우산과 천으로 된 우산이 나오면서부터일 것이다. 우산은 비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종이우산은 비가 가야 할 길을 잠시 에둘러 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종이우산은 빗물을 튕겨내지 않고 스르륵 미끄러지게 한다.

지금은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종이우산을 50년 넘게 고집스럽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전북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에 사는 전북 유일의 ‘지우산(紙雨傘)’ 장인 윤규상 씨(74)다.

○ 50년 넘는 종이우산 외길

그가 종이우산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열일곱 살 때다. 집안 형편 때문에 학업을 잇기 어렵게 되자 당시 전주역 부근 장재마을의 우산공장에 들어갔다. 그때만 해도 이 마을에는 종이우산을 만드는 곳이 30, 40가구나 됐다. 집집마다 마당과 골목에 널어놓은 기름 먹인 종이와 우산대가 가득했다. 전주는 종이우산 재료인 대나무와 한지가 풍부한 데다 질이 좋았다. 그는 진우봉 엄주학 장인으로부터 종이우산 만드는 법을 배웠다.

이곳에서 만드는 우산 가운데 ‘장내기’라 부르는 대중용은 장날 내다팔았고, 주문 상품인 ‘맞춤내기’는 부자들이 쓰거나 여염집 여인들이 패션 양산으로 가져갔다. 장마철을 앞두고는 가물 때 만들어 쌓아 두었던 우산이 전국에 용달차로 실려 나가곤 했다. 스물다섯에 독립해 우산공장을 차렸다. 한때 기술자를 10명이나 데리고 있기도 했다.

“당시 한 달에 보통 3000여 개의 우산을 만들어 전국에 팔았으니 월급쟁이보다는 훨씬 수입이 좋은 시절이었죠.” 19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종이우산은 비닐우산과 천 우산으로 대체됐고 1990년대 이후 중국산 우산이 들어오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그도 1980년대 한때 비닐우산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대나무 뜨개바늘 제작도 해봤지만 결국 다시 종이우산으로 돌아왔다.

종이우산을 만드는 일은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전 과정을 다 알아야 하고 하나를 만드는 데 80여 차례나 손길이 간다. 잘 트지 않는 때죽나무를 말려 댓살이 들어갈 수 있게 홈을 파 우산 꼭지를 만든다. 대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만든 36∼72개의 댓살을 홈마다 하나씩 끼우면 비가림의 얼개가 완성된다. 여기에 지름 2cm가량의 곧은 대나무로 만든 우산대를 묶는다. 그 다음 끓인 들기름을 펴 바르고 말린 한지를 감싸서 실로 묶어낸다. 한지가 물에 젖지 않도록 들기름을 끓여 골고루 펴 바르는 일 또한 만만치 않다. 한지에 먹인 들기름의 끈적거림은 온돌방에 불을 지펴 말리면 보송보송해진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거나 힘이 지나쳐 뒤집어지면 그동안의 공력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된다. 그의 말마따나 품질이 우수하고 미적으로도 뛰어난 종이우산은 오랜 공력의 결과물인 셈이다.

○아버지 가업 잇는 아들

우리나라는 연간 강우 일수가 100일이 넘는 데다 조선시대에 궁중에 우산 장인이 많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역사적으로 우산문화가 그리 발달한 것은 아니었다. 서민들은 값비싼 우산 대신 삿갓이나 도롱이를 많이 썼다. 우산이 활성화되지 못한 이유로 하늘을 떠받치는 우산의 형상을 중국 천자의 상징으로 여겼다는 설과 농사를 지을 때 비는 하늘의 축복인데 이를 가리거나 피하는 것은 하늘에 대한 불경으로 여겼다는 설도 있다. 개화기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쏟아지는 거리를 외국 선교사가 우산을 받치고 가다가 뭇매를 맞았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그의 꿈은 비 내리는 거리에서 종이우산을 펼쳐 들고 걷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이다. 지금도 일본이나 중국 태국 등지에서는 거리에서 종이우산을 쉽게 볼 수 있다. 아들 성호 씨(36)가 아버지의 소망을 잇고 있다. 성호 씨는 반도체 회사에 다니면서 주말에만 내려와 아버지 일을 돕다가 몇 년 전 직장을 그만두고 후계자로 나섰다.

“아들에게 이 힘든 일을 물려줘도 되나 고민이 많았지만 기꺼이 이어받겠다고 하니 기쁜 마음으로 하나둘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자가 합심해 종이우산을 만들고 있지만 문제는 수요다. 비 오는 날 쓰려고 사가는 사람은 없고 간혹 소장용이나 인테리어 소품으로 사간다. 그의 종이우산을 사서 천장을 장식하는 사람도 있고, 조각을 새긴 우산대와 천연 염색 한지를 가져와 우산으로 만들어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앞으로 화가의 그림을 받아 우산에 붙이는 작업도 생각하고 있다.

가격은 댓살 수와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개당 15만∼25만 원 선이다. 큰 것은 100만 원이 넘는 경우도 있다. 그는 2010년 전국한지공예대전 특선 등을 한 뒤 2011년 전북무형문화재 우산장으로 지정됐다. 대나무 가시에 찔린 상처들이 굳은살처럼 박여 있는 그의 손이 오늘도 부지런히 움직인다.

김광오 기자 ko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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