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동아/11월 27일]‘1000억 원보다 큰 사랑’으로 세운 절, 길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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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년 11월 27일 17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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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7월 1일이면 음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는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이 이날마다 곡기를 끊었던 건 연인 백석(白石·사진)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여인과 이 시인이 마지막으로 헤어진 건 1939년. 그 후 1996년 백석이 숨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여인도 1999년 세상을 떠났다.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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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은 1937년 함남 함흥 시에서 처음 만난 이 여인과 한 눈에 사랑에 빠져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라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백석은 시선(詩仙) 이백이 지은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와 이 여인에게 ‘자야(子夜)’라는 호를 지어줬다. 운명을 예감했던 걸까. 자야오가는 서역으로 오랑캐를 정벌하러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끊는 심정을 고백한 시였다.

“장안에 달 한 조각/집집마다 다음이질 소리/가을 바람 불어 그치지 않으니/모두가 옥문관(玉門關) 향하는 그리움이라/어느 날에나 오랑캐 물리치고/낭군은 돌아올 수 있을까.” - 자야오가 중 추(秋). (옥문관은 만리장성 서쪽 끝에 있는 관문)

자야라는 호를 얻기 이전에 사람들은 이 여인을 진향(眞香)이라고 불렀다. 기명(妓名)이었다. 맞다. 서울에서 김영한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이 여인은 가세가 기울면서 열 여섯 살에 기생이 됐다. 진향은 잡지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만큼 문학적 재능을 갖춘 기생이었다.

진향이라고 불리던 시절 자야. 동아일보DB
진향이라고 불리던 시절 자야. 동아일보DB

만난 지 얼마 안 된 두 사람은 곧 서울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지만 백석의 부모는 아들이 기생과 함께 사는 걸 마뜩치 않게 생각했다.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로 스스로를 달랬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부모가 강제로 다른 여성과 결혼을 주선하자 백석은 자야에게 ‘함께 만주로 떠나자’고 제안했지만 자야는 자기가 연인의 인생을 가로막게 될 것을 염려해 거절했다. 결국 백석은 1939년 홀로 만주 창춘(長春)으로 떠났다. 그렇게 3년에 걸친 두 사람의 만남은 영영 막을 내리게 된다.

서울에 남아 홀로 사랑을 이어가던 자야는 1951년 서울 성북동에 있던 청암장을 사들인다. 그리고 이곳을 요정(料亭)으로 탈바꿈시킨다. 삼청각, 선운각과 함께 한국 3대 요정으로 손꼽히던 대원각은 그렇게 문을 연다. 군사 독재 시절 ‘요정 정치’라는 낱말이 탄생한 곳이 바로 대원각이었다.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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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백석을 그리워하며 산 자야에게 애독하던 저자가 한 명 더 있었으니 바로 법정 스님이었다. 1996년 9월 26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자야는 1987년 미국 로스엔젤레스(LA)에서 법정 스님을 처음 만나 “아무 조건 없이 대원각을 시주할 테니 절로 만들어 스님이 운영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법정 스님은 “나는 일평생 주지 같은 일을 맡아본 적이 없을 뿐더러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라며 사양한다.


이후에도 자야는 시주 의사를 굽히지 않았고 1995년 법정 스님도 결국 주변의 권고에 못 이겨 시주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세운 절이 바로 나중에 법정 스님이 입적하게 되는 ‘길상사(吉祥寺)’다.

자야(왼쪽)와 법정 스님. 동아일보DB
자야(왼쪽)와 법정 스님. 동아일보DB

당시 동아일보는 “대지와 임야를 합쳐 7000여 평에 달하는 대원각이 시가 1000억 원 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하지만 자야는 “없는 것을 만들어 드려야 큰일을 한 것이 되는데 있는 것을 드리니 아무에게도 내세울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자야가 이 건물을 시주한 대가로 받은 건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이었다.

이듬해 1월 19일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 17층에서 ‘길상사 창건위원회’ 첫 공식 모임이 열렸고, 그해 12월 14일 개원식이 열렸다. 개원식에서 축사를 맡은 사람은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개원식을 2주 정도 앞두고 있던 1997년 오늘(11월 28일)자 동아일보는 자야가 남은 재산도 모두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자야는 나중에 “1000억 원이라는 돈이 그 사람(백석)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말했다.


길상사는 법정 스님이 불교에 귀의하려던(원래 그는 불교 신자가 아니었다) 자야에게 지어준 법명 길상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백석이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시절 살았던 하숙집 주소가 ‘도쿄(東京) 기지초지(吉祥寺·길상사) 1895번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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