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세계 장수촌]<1> 불가리아 스몰리얀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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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함께 온 인스턴트식품이 ‘불가리쿠스’를 덮쳤다

《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서 남쪽으로 245km 떨어진 스몰리얀 시. 1905년 불가리아 의사 스타만 그리고로프가 발견한 유산균인 ‘불가리쿠스’로 만든 요구르트의 본고장이다. 불가리아인의 장수 비결이라는 이곳의 요구르트는 세계적으로도 요구르트 선풍을 일으켰다. 그만큼 스몰리얀 지역은 장수촌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말 찾은 이곳에서 100세 이상의 장수자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한때 100세 이상 장수자가 인구 10만 명당 44명이었지만 이젠 약 8명으로 줄어들었다. 세계장수학회에선 100세 이상 인구 비율이 높은 곳을 지칭하는 ‘블루존’에서 스몰리얀을 제외했을 정도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일본 오키나와, 이탈리아 사르데냐 등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다른 장수촌들도 퇴색하는 기운이 역력하다. 진시황이 꿈꾸던 ‘불로장생(不老長生)’은 아니더라도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하던 인류의 염원이 지상(地上)에 구현됐다던 이들 장수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더구나 의학과 생활수준의 발달로 평균수명이 계속 길어지는 시대에 정작 장수촌은 왜 사라지고 있는 걸까.동아일보는 지난달 말 위기에 처한 장수촌을 찾아가 현장 취재했다. 장수를 어렵게 만든 이유를 뒤집어 보면 건강하게 오래 사는 비결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
○ 체제 변화 스트레스의 파괴력

스몰리얀에서 남쪽으로 27km를 더 가면 나타나는 산골짜기의 시비노 마을.

이 지역 최고령자인 사피아 메흐베도 에펜도바 씨(102·여)는 “400여 명이 거주하는 이곳 농촌 마을에서 나 말고는 100세 이상의 장수자는 물론이고 90대 이상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다른 마을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몰리얀에서 동남쪽으로 27km 떨어진 모길리차 마을에서는 100세 이상 장수자를 아예 찾을 수 없었다. 스몰리얀 시청 관계자는 “스몰리얀과 인근 농촌 지역에 거주하는 4만4000여 명 가운데 100세 이상 장수자는 4명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한때는 장수자로 가득하던 이곳의 급속한 몰락을 두고 현지 거주자들은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변화될 때 주민들이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물론 고등교육을 받고 대도시에서 컴퓨터 관련 업무를 하거나 무역업에 종사하는 상당수의 젊은층에겐 자본주의로의 체제 전환이 새 기회였다. 이들은 서구 국가의 잘나가는 젊은이만큼 많은 돈을 벌고 문화생활을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새로운 문물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노인들에겐 이런 경쟁의 스트레스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농촌 지역 고령자 대부분은 현 체제에 대한 불만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에펜도바 씨의 며느리 로자 에브게노바 씨(73)는 “불가리아는 지금 마피아만 잘살고 농민들은 죽을 지경”이라며 “오히려 사회주의 시절이 더 좋았다”고 말한다. 모길리차에 거주하는 마흐무트 라코프 씨(92)는 “사회주의 시절엔 모두가 직업이 있고 집도 있었지만 요즘은 실업자만 늘어났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목동이었던 라코프 씨는 “매일 요구르트 1kg과 신선한 우유, 콩으로 만든 음식과 감자를 먹고 하루 종일 움직이는 덕분에 건강을 유지했다”며 “하지만 점점 공장에서 만든 유제품과 인스턴트식품에 의존하는 노인이 늘어나면서 장수 노인을 찾기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고 자식들의 취업을 걱정해야 하는 노인들의 스트레스는 불가리아가 1989년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 체제로 바뀐 뒤 흔해진 풍경이었다.

○ 건강식품을 대체한 공장제조식품

현지 전문가들은 불가리아 체제 변화의 스트레스가 미친 영향과 함께 주변의 사회 문화적 환경 변화가 스몰리얀 장수촌 몰락의 주요 원인이라고 손꼽았다.

사회학 박사인 토도르 자구로 스몰리얀 시립도서관장은 “체제 변화로 삶의 방식이 바뀌고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게 됐다. 노인에 대한 젊은이들의 존경심까지 사라지면서 노인들이 심리적 스트레스에 시달려왔다”고 말했다.

사회주의 시절에는 비록 물자가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개인이 먹고살기 위해 경쟁할 필요는 없었다. 누구나 직장이 있고, 의료보험 혜택을 누렸다. 결혼하면 국가가 집을 제공했다. 아이를 낳으면 더 큰 집이 무상으로 제공됐다. 정부가 감당 못할 지출로 재정을 파탄시켰지만 국민은 큰 고민 없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쟁체제에 들어선 지금은 모두가 먹고살기 위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불가리아 스몰리얀 인근 모길리차 마을의 최고령자 메흐메딘 셀리모프 씨(97)가 혼자 낡은 집을 지키고 있다. 자식들은 모두 도시에 나가 홀로 매달 약 16만 원의 연금으로 연명하는 그는 겨우내 쓸 땔감을 마련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다. 스몰리얀 장수촌에는 셀리모프 씨처럼 노인이 혼자 거주하는 가구가 대부분이다.
불가리아 스몰리얀 인근 모길리차 마을의 최고령자 메흐메딘 셀리모프 씨(97)가 혼자 낡은 집을 지키고 있다. 자식들은 모두 도시에 나가 홀로 매달 약 16만 원의 연금으로 연명하는 그는 겨우내 쓸 땔감을 마련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다. 스몰리얀 장수촌에는 셀리모프 씨처럼 노인이 혼자 거주하는 가구가 대부분이다.
스몰리얀 시의 행정업무를 총괄하는 잠피르 코브체브 총서기(부시장급)는 의료 환경 변화에 주목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경제적 효율성이 중시되고 의사들이 돈을 벌기 위해 도시나 해외로 떠나면서 시골 사람들이 의료 혜택을 받기가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지역 내 장수문제를 연구해온 게오르기 카잘리예 씨(84)는 “하루에 61차례 비행기가 지나가면서 소음 공해가 생기고 자연에서 점점 멀어지는 생활을 하다 보니 장수하기가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이처럼 체제가 변하고 환경이 달라지다 보니 경제적인 풍요가 장수의 조건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자구로 도서관장은 “최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돈 많은 사람들이 더 오래 산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며 “이젠 시골의 장수촌보다 수도 소피아에 더 많은 고령자가 살고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 장수촌 연구 의사의 분석 “스트레스, 장수의 가장 큰 적” ▼


“최근 20년의 체제변화 과도기에 주민들의 생활이 무척 불편해졌다. 근심이 늘어나고 편안하지 않은 가운데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그런 스트레스가 장수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

스몰리얀 장수촌을 연구해온 우스토보 마을의 의사 아르기르 하지 크리스토브 씨(75)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장수촌이 퇴색하는 이유로 일터와 생활조건의 변화로 인한 스트레스를 먼저 꼽았다. 또 그는 “의사 수가 줄어들면서 주민들의 건강을 미리 돌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유전적인 조건과 좋은 생활환경을 장수의 기본적인 원동력으로 꼽았다. “가족 중 장수자가 많은 유전적인 조건은 엔도게니(내적 요인)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에쿠조게니(외부적 요인)인 해발, 습도, 공기 등의 조건이 맞아야 한다. 울창한 삼림을 가진 스몰리얀의 산지는 주민들이 자연스레 많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크리스토브 씨는 스몰리얀 장수자들의 특징을 이렇게 소개했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먹는 동시에 대부분이 이곳의 특유한 유산균 ‘불가리쿠스’로 만든 요구르트를 먹는다. 요구르트는 고기나 생선 등 다른 음식보다 사람 몸에 더 잘 흡수된다. 특히 이곳 특유의 풀과 사료 덕분에 요구르트의 효능이 큰 것 같다. 1970년대에 일본 사람들이 요구르트를 가져갔지만 사료의 성분이 달라서인지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 100세 노인 2명의 장수비결 “일하라, 도우라, 감사하라” ▼


“라보타, 라보타(일하고 또 일하라).”

지난해 12월 21일 불가리아 스몰리얀 시내의 자택에서 만난 시나 게오르게바 베드로브 씨(101·여)가 말한 장수 비법이었다.

7세에 고아가 된 베드로브 씨. 자신을 불쌍히 여긴 동네 아주머니에게서 불과 일주일 만에 재봉기술을 배웠다. 14세에 대출로 구입한 독일제 재봉틀 덕분에 재산도 꽤 모았다.

정작 베드로브 씨는 자신이 장수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릴 때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질병으로 걷지도 못했다. 당시 동네 주변에서 살고 있던 집시 여성이 푸닥거리 같은 주술을 행한 뒤에야 병이 나았다는 그는 결혼 전에는 부인병으로 큰 수술을 받기도 했다. 베드로브 씨는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고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신께서 장수를 허락한 모양”이라고 말했다. 스몰리얀 시 외곽 시비노 마을에서 만난 사피아 메흐베도 에펜도바 씨(102·여)의 장수비결은 규칙적인 생활과 건강 식단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된 집 안은 매사에 빈틈없이 정리하는 그의 성격을 드러냈다.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고 오후 9시에 잠자리에 든다는 에펜도바 씨는 “불가리아의 전통 요구르트와 우유, 감자 등 동네에서 생산되는 건강식을 매일 소량 섭취한다”고 말했다. 에펜도바 씨는 지금도 직접 음식을 준비하고 매일 빨래를 하는 등 쉬지 않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 덕분에 달리 아픈 곳도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스몰리얀=글·사진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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