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혁명 40주년]<2>알랭투렌 당시 낭테르大교수에 듣는다

  • 입력 2008년 1월 2일 02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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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사회학계를 대표하는 알랭 투렌(83) 교수는 1968년 당시 낭테르대 교수로 5월 혁명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당시 독일 접경지대에 위치한 스트라스부르대의 급진 사조를 낭테르대에 도입한 앙리 르페브르 교수와 함께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주인공으로 꼽힌다.

그는 프랑스 최고 지성들이 다닌 파리 고등사범학교(ENS)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노동사회학 분야를 개척한 뒤 1968년 이후 유럽과 남미의 사회운동을 연구했다. 지난해까지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교수로 강의했고 요즘도 연구실에서 다음 저서를 준비하고 있다.

정수복(53) 박사는 1982년 프랑스로 가서 투렌 교수의 지도로 EHESS에서 1988년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2002년부터 이 학교에서 ‘한국의 종교와 문화적 문법’을 강의하고 있다. 두 학자의 사제 간 대화를 통해 40년 전 68혁명의 현장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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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혁명 40주년]<2>알랭 투렌 당시 낭테르대 교수에게 듣는다

―투렌 교수님, 올해는 1968년 5월 혁명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당시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갖고 계신지요.

“파리 라탱 구(區)를 중심으로 경찰과 학생이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밤마다 대치했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5월 10, 11일 시위가 격렬했던 이른바 ‘첫 바리케이드의 밤’에는 라탱 구의 게뤼삭 거리에서 가로수들이 쓰러지고 뒤집힌 자동차들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24, 25일 두 번째 바리케이드의 밤은 더욱 격렬했는데 당시 노벨상 수상자인 화학자 자크 모노를 팡테옹 광장에서 만났던 기억도 나는군요. 파리 시내 전역에 100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해 동서남북으로 갈라져 행진했던 장면도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에게 해산을 명령했지만 학생시위 주도자였던 다니엘 콩방디(실제로는 다니엘 콘벤디트라고 불렸음)는 계속 남아서 농성을 하자고 주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시위 현장에서 어떤 느낌을 가지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대체로 시위에 긍정적이었지만 어느 순간 폭력에 대해 강한 공포심을 느꼈습니다. 폭력을 최소화하고 공공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운동 세력과 권력 당국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행히 콩방디와 알랭 페르피트 교육부 장관 둘 다 알고 있었기에 둘 사이의 채널 역할을 했습니다.”

―콩방디와는 특별한 관계였다고 들었습니다만….

“낭테르대 보직 교수들이 1968년 3월 22일 대학본부를 점거한 시위 학생들을 징계하는 임시 징계위원회를 열었을 때 교수 한 사람이 문제 학생들 한 사람씩에 대해 ‘변호사’ 역할을 하게 됐습니다. 저는 우연히 둥근 얼굴에 붉은 모발인 콩방디라는 학생의 변호사가 됐습니다. 당시 징계위원장이 콩방디에게 ‘3월 22일 오후 3시에 어디에서 무엇을 했느냐’고 묻자 ‘여자친구와 침대에 있었는데 당신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답변했던 게 기억납니다. 재미난 학생이었습니다. 그날 징계는 없었습니다.”

―당시 낭테르대 학생들은 르페브르와 투렌 교수까지 모욕하고 자극하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그랬나요.

“제가 경험한 바로는 무례한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교수가 강의실에 들어가려는 것을 학생들이 막아서 승강이가 벌어진 일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1968년에 출판된 ‘5월 운동 또는 유토피아적 공산주의’라는 저서에서 ‘1968년 5월 운동의 구호와 그 운동이 갖는 의미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는 주장을 하셨습니다만 5월 혁명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요.

“5월 혁명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강한 ‘이미지’들은 5월 혁명의 복잡한 의미를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5월 혁명은 예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비조직적 운동이었습니다. 당초 5월 혁명이 내건 구호들은 상당 부분 이미 낡아버린 마르크스주의에서 비롯됐죠. 그러나 실제로 노동자가 중심이 된 계급갈등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이런 것에서 벗어나 문화적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출현을 예고했다는 점에 오히려 의미가 있습니다. 184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2월 혁명이 공화주의적 정치 구호를 내세웠지만 그 밑에는 계급갈등의 출현이 잠복했던 것처럼 1968년 5월 혁명은 겉으로는 계급갈등에 기반을 둔 구호가 난무했지만 실체는 프랑스 사회의 문화적 변화를 요구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이었습니다.”

―5월 혁명이 대학생 수의 급증에 따른 대학의 위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아직까지 대학 개혁이 이루지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5월 운동 또는 유토피아적 공산주의’라는 책을 지금 다시 읽어보면 대부분의 해석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다만 대학의 위기 부분을 너무 과장해서 본 점은 오류로 생각됩니다. 5월 혁명은 대학의 위기가 아니라 프랑스 사회 전체가 안고 있던 문제의 표출로 보아야 합니다. 프랑스 사회는 1962년 알제리 전쟁이 끝난 뒤 전후 ‘재건의 사회’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지만 관습과 제도는 구태의연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5월 혁명에서는 스탈린주의의 수호자인 공산당을 왼쪽에서 비판하는 트로츠키주의나 무정부주의 같은 이념이 중요하게 작용했고 오늘날까지도 극좌 정당들이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소르본대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강했던 반면 낭테르대는 무정부주의적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권위주의적, 노동자 중심주의적, 교조적 태도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나온 ‘혁명의 깃발을 연약한 학생의 손에서 강건한 노동자의 손으로’라는 구호는 노동자 중심주의적 태도를 대변한 것입니다. 반면 콩방디를 비롯한 낭테르대의 학생 리더들은 이민노동자, 지역운동, 성 해방, 동성애 등 새로운 문화적 차원의 문제에 ‘열려’ 있었습니다.”

―오늘날 1968년 5월 혁명이 남긴 유산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나친 ‘톨레랑스(관용)’와 성적 해방이 무질서를 낳고 사회 기강을 해이하게 만들어 프랑스 사회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만….

“아이들이 교육을 잘못 받아 버릇이 없고 형편없다는 식의 주장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2000년 전 고대 로마시대에서나 중세 유럽에서도 그런 주장이 있었습니다.”

―19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386세대가 기성세대가 되면서 그들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68세대도 보수화되었다는 지적이 있는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68세대 전체를 한데 묶어 그렇게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 세대는 경제적 재산보다는 문화적 자원을 많이 가진 세대입니다. 학계 문화계 언론계 광고업계 등 3차 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68세대야말로 부르주아 보헤미안을 상징하는 ‘보보스(bobos)’로 보수주의자와는 거리가 멉니다. 물론 그들 가운데 정계로 나가 출세한 사람도 많습니다. 특히 마오주의자들 가운데 출세주의적 모습을 보인 사람이 많습니다.” ―5월 혁명이 선생님의 학문적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시는지요.

“제 이론적 성찰의 핵심에는 1968년 5월 혁명의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5월 혁명에 대한 수많은 긍정적 해석과 부정적 해석 속에서도 당시에 가졌던 제 생각을 대부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대담 : 제자 정수복 박사

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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