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억 이슬람과의 대화]"경제제재만 끝나면…"

  • 입력 2001년 4월 1일 18시 52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페르시아만의 석유 부국 이라크의 요즘 모습은 처참하다.

1990년 8월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이듬해 1월17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은 이라크를 공격했다. 3월3일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종전협정에 도장을 찍기까지 10만명이 숨졌고 부상자 30만명, 포로 6만명이 발생했다.

당시 다국적군 공군기의 무차별 폭격 흔적은 이라크 영토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질병과 영양부족으로 죽어가는 아이들, 외화벌이를 위해 떠나는 청장년들, 날품팔이에 나선 부녀자들, 해외로 유출되는 고급인력들. 가혹한 경제제재 조치 여파로 이라크의 가정과 사회적 기반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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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는 왜 이처럼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일까. 대부분의 외국인은 이웃 나라를 무자비하게 침략한 만큼 당연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라크인은 ‘걸프전쟁은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충돌’이라고 믿고 있다.

초등학교 아랍어 교사인 사미르 모하메드 아메드(40)는 “쿠웨이트는 서구 식민제국이 억지로 만들어낸 ‘반이슬람 꼭두각시 나라’인 만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점령한 것은 정당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은 페르시아만 일대의 경제적 이익을 유지하는 관심에서 이라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 보도진이 취재허가를 받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이라크 공보처 부설 프레스센터의 출입문 옆에는 쿠웨이트를 포함한 이라크 전국 지도가 걸려 있다. 민간에 유통되는 지도 역시 대부분 쿠웨이트를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역사를 훑어보면 이라크인이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명백해진다. 쿠웨이트는 원래 이라크 남부 바스라 주의 한 군(Qadha)에 지나지 않았다. 20세기초 중동 지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하고 있던 제국주의 침략국 영국은 페르시아만에 인접한 이곳에 엄청난 석유가 매장된 사실이 확인되자 ‘국가 분할’ 계획을 꾸몄다. 중동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를 영구적으로 자국 영향 아래 두기 위해 영국은 이라크의 의사와 관계없이 멋대로 국경선을 긋고 이라크의 지방토호였던 사바족을 쿠웨이트왕가로 만든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이라크는 여태 쿠웨이트를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수차례 병합을 위해 국경을 넘기도 했으며 그때마다 영국의 저지를 받았다. 이후 미국 패권시대가 되면서 쿠웨이트는 중동의 대표적인 친미국가로 변했다. 쿠웨이트는 유가상승을 노린 아랍 석유생산국가의 원유감산 방침에 반기를 들고 오히려 증산을 하기도 했다. 또 이란―이라크 전쟁(80∼88년) 때에는 이라크 영토의 일부를 포함한 루마일라 유전을 개발해 이라크를 자극했다.

이라크인은 외지인에게 굳이 이런 역사를 장황하게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바그다드대 영어교육학과 옴란 무사 마후드 교수(56)는 “쿠웨이트를 침공하지 않았다면 학생들이 책이 없어 논문을 쓰는 못하는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라고 묻자“우리가 왜 이런 고통을 겪는지 신은 분명히 알고 있다”고 말한다. 외세 때문에 빼앗긴 자국 영토를 회복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을 이렇게 대신 한 것이다.

요즘 이라크를 방문하는 외국인이 가장 자주 듣는 영어는 ‘생션(sanction·경제제재)’이라는 단어다. “생션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생션 전에는 우리도 이렇게 살지 않았다” “생션이 끝나면 곧 달라질 것이다” 등등. 이라크인들은 경제제재가 언제 풀릴 것 같으냐고 물으면 거의 대부분 “곧 끝날 것”이라고 대답했다. 경제제재 해제에 대한 이라크인들의 열망은 이만큼 대단했지만 경제제재를 풀어달라고 미국에 구걸하지는 않겠다는 태도였다.

미국 여배우 줄리아 로버츠의 열광적인 팬이라는 컴퓨터 공학도 나이더 이브라힘(22)은 “경제제재가 풀리면 가장 먼저 컴퓨터를 사서 MP3를 듣고 싶다”고 했다. 그는 “후세인 대통령이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이처럼 가혹한 제재를 받을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10년간의 혹독한 경제제재 조치도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끼고 번성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후 수메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등 찬란한 고대 문명의 후예인 이들의 자부심을 꺾지 못한 것 같다. 이라크인의 자존심은 최근 요르단 암만에서 열린 아랍정상회의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이라크는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상호 주권을 인정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폐막결의안 채택을 끝까지 반대했다. 결코 쿠웨이트를 독립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걸프전의 공식종결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의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바그다드〓신치영특파원>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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