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살아보니]이데 유미꼬/약속시간 지켰다 돌부처 됐죠

  • 입력 2001년 6월 19일 18시 39분


한국에 온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 두 배의 시간을 한국에서 지낸 셈이다. 때문에 한국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는 20년이라는 세월만큼이나 많다.

우선 한국의 음식은 정말로 마음에 든다. 고춧가루에 중독 성분이 있다는 얘기도 있지만, 한번 먹고 나면 또 찾게 되는 매력을 항상 느껴온 터라 나의 한국 음식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다. 이밖에 한국 사람들의 활달한 성격이나 당찬 기질 등도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한국인들의 약속시간 감각에 관한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갔던 소풍이 생각난다. 선생님께서는 지각을 하면 소풍을 가지 못하니 반드시 시간을 지키라고 누차 강조했고, 나는 그 말에 긴장하여 아침 일찍부터 준비해 제 시간보다 빨리 학교 운동장에 도착했다. 나말고도 미리 와서 기다리는 사람은 많았다. 소풍은 정시에 출발했고, 그 때 약간이라도 지각을 했던 학생은 결국 소풍을 못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소풍 양상은 좀 다르다. 떠날 시간이 되었는데도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도 적지 않다. 더욱 이상한 것은 지각생 때문에 시간이 늦춰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들 너무도 ‘익숙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나는 한때 이런 양상을 단순한 문화적 차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인들은 정이 많고 사람들간에 끈끈한 정이 배어 있다고 느껴온 까닭에, ‘지각생을 기다려주는 행위’도 그런 문화 차이의 일환으로 생각한 것이다. 사실 입장을 바꾸어 만약 내가 지각했을 때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다려 준다면 그들에게 얼마나 고마움을 느낄까 생각해 보면, ‘지각생 기다려주기’와 같은 비합리적인 행동에서도 한국인의 의식을 엿볼 수 있긴 하다.

문제는 내가 이런 생활에 익숙하지 못하여 종종 낭패를 본다는 사실이다. 5월이면 대학에서는 4학년생과 교수들이 단체 졸업사진을 찍는 행사가 있다. 어느 해 졸업사진을 찍는 날 나는 ‘시간은 칼같이 지켜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15분 전에 약속장소로 갔다. 자리를 준비하고 한번 앉아보기도 하며 예행연습까지 해보려면 그 정도 여유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약속장소에는 아무도 없었고 준비도 안되어 있었다. 약속시간이 20분 지난 뒤에야 학생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기다리다 지쳐서 그 해의 사진촬영을 포기했다.

독자 중에는 겨우 20분 때문에 지쳤다는 얘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약속시간이 되었는데도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덜컥 ‘내가 시간을 잘못 알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다음해에는 일부러 약속시간보다 30분을 늦춰 나갔다. 나름대로는 주위 사람들의 생활주기에 맞추기 위한 행동이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벌써 촬영이 끝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두 해의 졸업앨범에는 내 사진이 없다.

요컨대 내가 이렇게 사람들과의 약속을 그르치는 이유는 약속시간에 대한 ‘정의’가 한국인들과는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소풍을 갈 경우 나에게 있어 약속시간이란 ‘만나서 떠나는 시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약속시간보다 10분쯤 먼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반면 한국인들은 ‘약속시간’을 ‘모이는 시간’ 내지는 ‘슬슬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는 시간’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

어쨌든 20년이라는 세월을 한국에서 보냈고, 앞으로도 계속 한국에서 살 생각이며, 국적까지 대한민국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나도 한국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한국인으로서 진정으로 바라건대, 먼저 온 사람을 기다리게 해 선의의 피해자로 만드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약력:1950년 일본 도쿄에서 출생한 뒤 무사시노 음악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교육학)를 받았다. 연세대와 추계예술대에서 강사로 활동했으며, 1988년부터 단국대 음악대학 교수(피아노 전공)로 재직하고 있다. 논문으로 ‘음악능력과 대뇌반구 우위성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이데 유미코(단국대 음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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