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묻혀 울던 국군용사의 넋, 65년만에 편히 눕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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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서 유해 발굴… 가족 품 찾아 떠나
6일 현충일, 이제야 모십니다…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이 1일 강원 홍천군의 한 야산에 설치한 작업 표지판. 감식단은 지난달부터 홍천 일대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한 결과 지금까지 유해 15구를 찾아냈다. 홍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이 1일 강원 홍천군의 한 야산에 설치한 작업 표지판. 감식단은 지난달부터 홍천 일대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한 결과 지금까지 유해 15구를 찾아냈다. 홍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분명 ‘사람의 발가락’이었다. 하마터면 흙더미에 파묻힌 나뭇가지로 착각할 뻔했다. 검은 흙을 걷어낼수록 다섯 개의 발가락뼈는 선명해졌다. 오랜 세월에 전투화는 거의 썩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밑창 일부와 남루한 테두리 부분이 그나마 남아 고인의 발을 감싸고 있었다. 1951년 5월 남하하던 중공군에 맞서 강원도 벙커고지 전투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한 용사의 유해가 빛을 본 것은 무려 65년 만이었다.

1일 강원 홍천군 사오랑고개 자락 무명755고지.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 대원들은 조국을 위해 청춘을 바치고 차가운 땅속에 묻힌 참전용사의 유해를 행여 훼손할까 한낮 땡볕에도 수술용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한 채 붓으로 조심스레 흙을 털어냈다.

고인의 전투화 밑창 잔해와 발가락뼈가 위를 향한 채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볼 때 용사는 물구나무를 선 듯 거꾸로 땅속에 묻혀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고인은 65년간 불편한 자세로 조국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해 발굴 베테랑인 안순찬 감식단 팀장은 “거꾸로 땅속에 묻혀 있는 유해는 처음이다. 당시의 긴박함과 참혹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대부분의 유해가 웅크리거나 팔이 꺾인 상태이지만 이번처럼 완전히 거꾸로 발견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국방부가 2000년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을 시작한 이후 찾아낸 국군 전사자의 유해는 9100여 구에 이른다.

 

▼ 남루한 군화조각이 발을 감싸고 있었다… 홍천 유해발굴 현장▼

1일 강원 홍천군의 한 야산에서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과 육군 11사단 장병들이 전날 수습한 6·25 전사자의 유해에 경례하고 있다. 홍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1일 강원 홍천군의 한 야산에서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과 육군 11사단 장병들이 전날 수습한 6·25 전사자의 유해에 경례하고 있다. 홍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팀장님! 용사님의 유해로 추정되는 장골(長骨)이 발견됐습니다. 완전 유해일 가능성이 큽니다!”

1시간 가까이 땅을 파헤치며 발굴 작업을 계속하던 감식단 송재홍 상병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흙뭉치처럼 보이는 검은 물체 주변으로 대원들이 몰려들었다. 정강이뼈와 발목뼈, 그리고 둘의 연결부위가 한눈에 들어왔다. 송 상병은 “이렇게 연결된 뼈가 제대로 보존돼 있는 것을 보면 토층 아래 나머지도 온전하게 남아 있는 완전 유해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감식단이 지금까지 발굴한 유해 가운데 완전 유해는 100구 중 서너 구에 불과할 만큼 희귀하다.

유해 주변 흙을 조금 더 덜어내자 용사가 전투 당시 쓴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US’(미국)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숟가락, 전투식량 용기 등 군 보급품도 눈에 띄었다. 한 발도 사용하지 않은 탄 클립도 발견됐다. 유해와 함께 소지품까지 나오자 마치 고인이 바로 옆에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1일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 대원이 65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6·25 전사자의 발가락뼈에서 조심스럽게 흙을 털어내고 있다. 홍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1일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 대원이 65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6·25 전사자의 발가락뼈에서 조심스럽게 흙을 털어내고 있다. 홍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장골을 발견한 뒤 작업 속도는 훨씬 더뎌졌다. 유해를 조금이라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대원들은 기꺼이 속도를 늦췄다. 고고학자들이 고대 유물을 발굴할 때처럼 유해 주변에 있는 나무 잔뿌리도 일일이 잘라냈다. 정밀 작업을 할 때는 한줌도 안 되는 흙을 수십 번에 걸쳐 옮겼다. 불편한 자세로 쪼그리고 앉아 10분 넘게 수백 번 붓질을 했지만, 땅속 깊이 묻힌 유해는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30분이 넘어서자 다리가 저려오고 등에 땀줄기가 맺혔지만 대원들은 자세 한 번 고치지 않고 유해 발굴에 온 정성을 쏟았다. 유해 1구를 꺼내기 위해선 이렇게 2, 3일을 꼬박 매달려야 한다.

감식단이 찾아낸 유해들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담한 모습인 경우가 많다. 감식단 공보담당 이원웅 소령은 “동물에게 뜯겨 심하게 훼손되기도 하고 나무뿌리가 뼛속을 파고들기도 한다”며 “발굴된 유해를 보면 고인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날 발굴 현장 주변에선 전날 발견한 국군 용사의 명복을 기리는 약식 제사가 열렸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지 65년 만에 받는 조촐한 제사상이었다. 대원들은 고인의 유해를 오동나무 관에 담은 뒤 태극기로 감쌌다. 이어 그 앞에 차린 제사상에 술 한 잔과 북어포를 올렸다. “호국영령에 대한 경례!” 대원들과 유해 발굴 지원에 나선 11사단 장병들이 고인을 향해 일제히 손을 올렸다.

산야에 숙연함이 감돌았고 이내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자신을 찾아준 후배들에게 고인이 보내는 감사의 표시 같았다. 반세기 하고도 15년을 더 기다려 전역한 젊은 용사는 후배들의 거수경례를 받으며 비로소 가족의 품을 찾아 떠났다.

지금까지 발굴한 9100여 구의 유해 가운데 유가족에게 인도된 것은 113구뿐이다. 대부분 감식단 유해보관소에 안치돼 있다. 신원을 확인하려면 유해의 유전자와 유족이 등록한 유전자를 대조해야 하는데 유전자 등록이 지지부진하기 때문이다. 전쟁 직후 미수습 전사자는 13만2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부에 유전자 등록을 한 전사자 유가족은 약 3만 명에 불과하다.

이학기 감식단 단장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국군 용사들을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낸다는 사명감으로 일하고 있다”며 “이들의 빠른 귀환을 위해 전사자 유가족과 국민의 제보가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말했다. 6·25 전사자 유가족 유전자 등록 문의 및 관련 제보는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1577-5625)으로 하면 된다.
 
홍천=강승현 기자 byhu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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