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 책]로버트 P 크리스 ‘측정의 역사’ (노승영 역, 에이도스, 2012)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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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를 들이대기 전에 본질에 주목하라

요즘 학력파괴 채용 붐이 거세다. 창조경제 시대에는 이른바 개인의 스펙(spec)보다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똘똘 뭉친 유망주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언제부턴가 진학, 취업, 결혼 등의 기준이 된 스펙. 스펙은 인간을 특정한 기준에 따라 측정해 서열화하기 용이한 구조로 만든다. 측정이라 하면 자로 길이를 재고 저울에 무게를 다는 것 정도를 떠올리지만, 어느덧 인간의 능력과 감정도 측정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마치 세상은 측정 가능한 존재만이 측정 가능한 운동을 하는 무대가 된 것 같다.

미국 뉴욕주립대(스토니브룩)의 학장이자 철학과 교수인 로버트 P 크리스가 쓴 ‘측정의 역사’는 표준 도량형의 정착 과정을 흥미롭게 풀어냈다. 자도 저울도 없던 선사시대에 처음 등장한 도량형은 수천 년간 부단한 개량을 거쳐 표준화됐다. 개량 과정에서는 가장 아둔한 사람도 가장 똑똑한 사람과 대등하게 거래할 수 있게 한다는 본질이 추구됐다. 도량형이 자본주의 출현의 핵심이자 현대사회를 유지하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사실에는 이의를 달기 어렵다.

그러나 저자는 도량형이 권력에 의해 오용됐던 역사를 반추하며 측정이 사악한 억압의 수단이었다는 견해를 편다. 100여 년 전 일제가 수탈을 목적으로 측량했던 땅 위에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 국토를 측량하는 공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있어서인지 공정한 측정과 인류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다가온다.

현대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정확한 측정이 필수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현대인은 ‘무엇을 측정하는가’ 혹은 ‘왜 측정하는가’보다 측정 자체에만 몰두하고 결과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까닭에 오차를 넘어선 오류를 범하게 된다. 장터에서 상인과 손님이 정확한 측정 없이 흥정만으로 거래를 하더라도 양측이 만족하는 선량한 거래였다면 그것은 측정의 본래 목적에 부합한다. 반대로 진학과 취업에 용이한 구조로 인간을 측정한 결과 창조적 인재가 외면 받는다면 그것은 측정의 사악성을 드러내는 단적인 예가 될 수 있다.

김영호 대한지적공사 사장
김영호 대한지적공사 사장
프랑스어로 ‘모든 시대를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해’라는 구호인 ‘A tous les temps, a tous les peuples∼!’는 측정 분야에서 흔히 사용된다.

필자가 몸담은 공사에서 추진 중인 지적 재조사에 있어서도 이는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원칙이다. 자를 들이대기 전에 본질에 주목하는 것이야말로 측정의 녹록지 않은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이다.

김영호 대한지적공사 사장
#측정의 역사#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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