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현장에선 지금…]<2>국내 투자의 씨가 마른다

  • 입력 2004년 4월 20일 17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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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정부가 호남지역 발전을 위해 의욕적으로 조성한 광주 첨단과학 산업단지.

지역 주민들은 이 단지를 두고 ‘밤에만 첨단’이라고 말한다. 이 단지는 공장부지만 사놓고 투자를 미루고 있는 기업이 많은 데다 아직 분양되지 않은 땅도 적지 않아 공단이라기보다는 허허벌판에 가깝다.

그러나 배후단지에는 러브호텔과 룸살롱 등 유흥시설이 들어서 밤에는 휘황찬란한 곳으로 바뀐다. 공장 입주가 제대로 안 되면서 배후단지에 거주할 주민들도 들어오지 않자 유흥시설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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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새성장산업 투자늘려 후방효과 확산"

한국산업단지공단 서남지역본부 박진만 과장은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광(光)산업이 아직도 걸음마 수준이고 입주가 예정된 대기업들이 투자를 미루면서 단지 조성이 본 궤도에 들어서지 못했다”고 말했다.

▽꺼져가는 투자의 불씨=삼성과 LG의 디스플레이 증산경쟁은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삼성이 투자한 충남 천안시와 아산시의 크리스털밸리, LG의 경기 파주시 액정표시장치(LCD)단지에 가면 넘쳐나는 신규투자로 역동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국내는 물론 일본 등 해외 부품업체까지 몰려들어 거대한 클러스터(집적단지)가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신규투자의 열기는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느낄 수 있다. 부산 대구 광주 등 전통적인 업종이 몰려 있는 지방공단으로 시선을 돌리면 산업 공동화(空洞化)가 우려될 정도로 침체돼 있다.

“현재 규모를 유지하는 것도 벅찬데 신규투자는 생각도 못 합니다.”

한국의 섬유산업을 이끌어 온 대구 성서공단에서 스포츠 의류 원단을 만드는 K섬유 P사장은 “섬유업계의 화두는 투자가 아니라 생존”이라며 한숨 지었다.

중국 돌풍으로 섬유업체 앞에는 4가지 선택이 있다. 임금이 싼 중국이나 베트남으로 공장을 옮기든지, 중국 업체가 생산할 수 없는 고가제품을 만들기 위해 연구개발(R&D) 투자에 집중하는 것, 업종을 전환하는 것, 아예 사업을 포기하는 것 등이다.

대부분의 섬유업체는 이 가운데 해외 이전이나 사업 중단을 선택한다. R&D 투자는 뚜렷한 성과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 외환위기 이후 부도사태를 지켜본 기업인들이 모험을 하지 않는 것이다.

13일 부산 사상구 학장동 사상공업단지. 신발과 고무, 봉제업체가 대부분이었던 이곳의 생산라인이 철거돼 빈 터는 폐고철 수집창고로 이용되거나 아예 폐허로 방치돼 있다.

공장의 철제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거나 녹슨 곳도 많다. 공장지대였던 모라동과 학장동 일부지역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바뀌고 있다.

석유화학과 철강 등 일부 업종은 최근 수출 호조로 야근까지 하며 물량을 맞추는 등 호황을 맞고 있다. 이들 기업도 신규 설비투자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철강중장비를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하는 성지기업 이명숙(李明(숙,척)) 사장은 “밀린 주문량을 맞추려고 공장을 증설할까도 생각했지만 공장부지가 평당 450만원에 달해 채산성이 맞지 않을 것 같아 단념했다”고 말했다.

▽쇠퇴해 가는 기업가정신=최근 지방공단에는 아예 사업을 포기하고 공장을 다른 기업에 임대하는 기업인이 늘고 있다. 공장 부지를 몇 필지로 쪼개 영세업체에 임대하는 기업인도 많다. 대구 성서공단에서 확인한 임대공장만 10곳을 넘는다. 공장을 외국으로 이전하는 기업은 그나마 모험정신이 살아 있는 곳이다.

산찬섬유 피문찬 사장은 “많은 기업인이 지금까지 모은 재산이라도 지키기 위해 공장을 매각하거나 임대한 뒤 골프를 치면서 소일하거나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다”고 말했다.

염색업체 120여개가 몰려 있는 대구 염색공단에서는 창업자가 2세에게 사업을 물려주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유학 중인 아들이 어려운 처지의 아버지를 도와 함께 경영하다 회사 부도로 집안까지 망한 사례가 생겼기 때문이다.

L사장은 “규모를 줄이면서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안 되면 사업을 포기한다는 분위기가 퍼져 있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이 1, 2월 해외투자를 78% 늘렸지만 국내 투자를 5% 줄였다는 통계를 공단에서 체감할 수 있다. 온갖 장애를 극복하며 기업을 일으켰던 창업자의 기업가정신도 그들의 나이처럼 쇠퇴해 가고 있다.

광주 하남산업단지관리공단 김영현 과장은 “중국의 추격이나 내수 침체로 기업 여건이 안 좋은 것도 문제지만 정말 심각한 것은 기업인들이 기업을 경영할 의욕을 잃어간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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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기자 eye@donga.com

조인직기자 cij19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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