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노블리안스]이은우/피지의 경제실패가 남긴 교훈

  • 입력 2004년 6월 6일 17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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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국내에서 5조원의 돈이 송금이나 이주비 명목으로 해외로 새나갔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문득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를 떠올렸습니다. 4년 전 피지에 출장을 갔다가 보고 들은 것이 한국에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피지는 남태평양에서 호주, 뉴질랜드 다음으로 큰 나라입니다. 인구는 인도계가 40%, 원주민 50%, 나머지 소수민족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80년대 중반까지 경제는 인도계가 장악하고 정치는 원주민이 맡았습니다. 인도계는 경제 마인드가 있는 반면, 원주민은 순하고 다소 게을러 경제력이 떨어진답니다.

87년 인도계가 일부 원주민을 끌어들여 정치까지 장악하자 원주민의 반발이 거세졌습니다. 이 틈을 타 원주민 출신의 육군 중령 람부카가 무혈 쿠데타에 성공합니다.

람부카는 경제를 주도하던 인도계를 압박하고 극단적인 원주민 우대 정책을 폈습니다.

외국인이 피지에서 기업을 설립하려면 반드시 원주민과 합작을 해야 하는 규정도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그러자 부유한 인도계를 중심으로 한 경제인들의 ‘돈 탈출’이 러시를 이뤘습니다. 당시 만났던 교민과 외교관에 따르면 람부카가 집권한 후 3∼4년 동안 무려 200억달러의 돈이 인근 뉴질랜드 호주 등으로 빠져나갔답니다. 그 후유증으로 피지경제는 회복불능의 타격을 받았습니다.

피지는 영국 여왕을 국가 원수로 하는 영연방 국가였습니다. 피지는 최대 수출품인 사탕수수를 좋은 조건으로 영국에 수출하는 등 연방국으로서 혜택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람부카는 집권 후 자주(自主)를 내세워 영 연방에서 탈퇴했습니다. 쿠데타의 정당성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죠. 영 연방 탈퇴도 피지경제를 피폐하게 만든 한 요인이었습니다.

한국인의 해외 송금과 최근 한미관계를 피지의 역사와 나란히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명분의 과잉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은우 경제부기자 lib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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