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 71]「주체사상 망명」전말 ②

  • 입력 1998년 8월 13일 19시 30분


북한 노동당 황장엽(黃長燁)비서가 중국 베이징(北京)주재 한국영사부에 망명을 신청한 직후인 97년 2월12일 오전.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청와대 본관 집무실의 인터폰으로 유종하(柳宗夏)외무장관과 권영해(權寧海)안기부장을 찾았다. 김대통령은 벨이 울리자마자 인터폰으로 응답한 두사람에게 엄중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가능한 한 빨리 황비서를 서울로 데려오시오.”

황비서의 서울 직행(直行)을 조기에 매듭지으라는 지시였다.

이날 오후 권오기(權五琦)통일부총리 주재로 유외무 김동진(金東鎭)국방 오인환(吳麟煥)공보처장관과 권안기부장 김광일(金光一)청와대 비서실장이 참석한 가운데 안기부에서 열린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의 결론도 ‘빠른 시일내에 사건을 매듭짓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상황은정부의의도대로 진행되지않았다.

이날 오후 중국 외교부를 찾아간 주창준(朱昌駿)중국주재 북한대사는 “황비서는 납치된 것”이라며 황비서의 신병을 북한측에 인도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홍콩언론들은 ‘김정일이 중국 고위층에 직접 전화를 걸어 중국정부가 황씨 문제를 선처해주면 중국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 예전의 형제관계로 되돌아갈 것을 약속했다’고 보도했다. 그만큼 북한측도 필사적이었다.

당시 정부 고위 관계자의 증언.

“주창준대사는 당시 탕자쉬안(唐家璇)중국 외교부 부부장에게 ‘한국측이 황비서를 서울로 데려가면 엄청난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협박까지 했습니다. 무력도발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었죠.”

실제 한국정부도 황비서의 ‘베이징 거사(擧事)’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관계당국은 보안유지를 위해 황비서가 베이징 주재 한국영사부에 들어간 뒤에야 정종욱(鄭鍾旭)주중대사에게 공식통보를 해줬다. 중국정부도 황비서의 망명을 사전에 감지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다시 고위 관계자의 설명.

“정부는 황비서가 일본에서 망명하면 서울 직행을 시도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망명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당시 중국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습니다. 다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망명을 감행토록 황비서측을 설득한 것입니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일부 국내언론들의 과잉보도였다. 특히 망명 당일 일부언론에 황비서의 친필수기까지 공개되자 중국측은 ‘한국정부가 언론플레이를 한다’며 극도의 불신감을 보였다.

한국정부의 성급한 태도도 문제였다. 황비서의 망명 당일인 12일 오후5시경 오인환 공보처장관은 황비서의 망명사실을 긴급기자회견을 통해 공식 발표했다.

중국측은 공식적으로 “관할권을 갖고 있는 중국정부가 본인의 망명의사를 확인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한국정부가 망명사실을 발표한 것은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노골적인 불쾌감을 나타냈다.

정종욱 전주중대사의 술회.

“황비서가 망명하자 마자 본국 정부에서 외신기자회견을 가지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망명을 빨리 기정사실화하라는 뜻이었죠. 나는 중국 공안당국이 총영사관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어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중국측과의 협상이 끝나기도 전에 회견을 하면 황비서를 한국에 데려갈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본국정부에 ‘불가(不可)’통보를 했습니다.”

정대사는 대사관 전화가 모두 도청되는 점을 고려, 안기부장과 외무장관 등에게 전화를 걸면서 의도적으로 “기자회견을 하면 절대로 안된다”고 항의하는 쇼까지 연출했다. 도청을 의식해 일부러 중국정부를 안심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시작부터 꼬이기 시작한 중국측과의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다.

첸치천(錢其琛)중국외교부장은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 유럽정상회의(ASEM)외무장관 회담에 함께 참석한 유종하장관과 2월14일 가진 회담에서 한국측의 성급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중국정부는 황비서의 망명에 대해 완전한 암흑상태다” “북한이 다른 얘기(납치됐다는 주장)를 하고 있는 만큼 상황파악을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중국측의 주장이었다. 이에 앞서 2월13일 유장관의 특명을 받고 급거 베이징에 도착한 김하중(金夏中)외무장관 특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서울 직행불가’라는 중국의 강경한 태도였다.

회담의 진척이 지지부진한 양상을 보이자 김대통령은 하루에도 몇번씩 관계자들을 찾아 황비서의 서울 직행문제를 빨리 타결짓도록 재촉했다.

다른 정부 관계자의 증언.

“참모진은 망명사건 처리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김대통령에게 누누이 설명하면서 조급함을 가라 앉히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89년 톈안(天安)문사태 이후 미국에 망명한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 팡리즈(方勵之)의 경우 협상에 1년 이상 시간이 걸렸다는 예도 들었죠. 결국 김대통령도 나중에는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습니다.”

2월17일 황비서의 망명의사를 직접 확인한 중국정부의 통보를 받은 북한은 “변절자여 갈테면 가라”는 방송을 통해 마침내 황비서의 망명을 기정사실로 인정했다.

그러나 북한당국을 의식한 중국정부는 ‘황비서의 망명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과 제삼국 경유를 새로운 조건으로 제시했다.

사실 당시 남북한 사이에서 중국정부도 괴로운 입장이었다. 북한측이 마지막까지 제삼국 영구거주를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관할권’을 앞세워 북한을 설득한 중국정부의 중재노력이 주효, ‘제삼국 경유 서울행’으로 타결됐지만 북한은 ‘3∼4개월 제삼국 체류’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한국도 제삼국 체류기간 단축을 전제로 중국측의 중재를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전정부 관계자는 “김대통령이 장쩌민(江澤民)주석에게 친서를 보내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외국언론의 보도는 사실이 아니었다”며 “그러나 협상테이블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구두로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어느 국가를 경유지로 택할 것인가가 새 과제로 부상했다.

이 관계자의 증언.

“처음에는 정부내에도 필리핀 경유에 반대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슬람반군 등 정정이 불안한 상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었죠. 이미 노르웨이 호주 싱가포르 등에 의사를 타진한 결과 모두 ‘OK’였습니다.”

그러나 이동에 걸리는 시간 등을 감안해 최종적으로 경유지는 필리핀으로 결정됐다.

황비서의 필리핀행이 순조롭게 진행된 데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회담 등을 통해 가까워진 김대통령과 피델 라모스 필리핀 대통령의 개인적 친분도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한중(韓中)간 협상이 진행중이던 97년 3월초 반기문(潘基文)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대통령 특사로 극비리에 필리핀을 방문했다. 라모스 대통령과 육사동기인 어네스트 기다야 주한필리핀대사도 동행했다.

반수석이 도착한 시간에 때마침 골프를 치고 있던 라모스 대통령은 연락을 받고 반수석을 골프장으로 직접 오도록 했다. 그는 황비서를 필리핀에 체류하도록 해달라는 반수석의 요청에 두말없이 “김대통령과의 돈독한 우정을 고려해 요청을 받아들이겠다”고 흔쾌히 허락했다.

황비서의 필리핀 경유 서울행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3월18일 엄중한 경호속에 베이징을 출발, 필리핀에 도착한 황비서와 그의 측근 김덕홍(金德弘)씨는 한달여의 체류기간을 거쳐 4월20일 마침내 서울에 들어왔다. 베이징 영사부에 망명한 날로부터 67일 후였다.

황비서의 필리핀행 과정에서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 하나.

황비서의 베이징 망명을 외무부측에 철저히 비밀에 부쳤던 관계당국은 역시 보안을 이유로 당시 이장춘(李長春)필리핀 대사에게 황비서가 도착한 뒤에야 그 사실을 통보했다. 괄괄한 성격의 이대사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관계당국 현지 책임자를 심하게 질책한 뒤 유종하외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거칠게 항의했다는 후문이다.

〈이동관·김차수기자〉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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