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골목 가정집에 들어선 ‘사랑방 병원’…<3>서울 ‘성북동91번지의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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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착한 병원]

서울 성북동91번지의원 진료실은 환자와 의사의 자유로운 소통을 위해 큰 책상과 진료대를 없애고 가정집 응접실 형태로 꾸몄다. 이곳에서 모녀 감기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최명은 원장(오른쪽).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서울 성북동91번지의원 진료실은 환자와 의사의 자유로운 소통을 위해 큰 책상과 진료대를 없애고 가정집 응접실 형태로 꾸몄다. 이곳에서 모녀 감기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최명은 원장(오른쪽).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 붉은 단풍물이 들기 시작한 지난해 가을, 의사 최명은 씨(33)가 몰티즈 강아지 가을이와 함께 서울 남산에 올랐다. 사랑하는 강아지 가을이에게 ‘작은 실험’의 시작을 가장 먼저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학병원 인턴 시절 내내 명은 씨의 머릿속을 맴돌던 고민이 있었다. ‘의사와 환자가 편안한 진료실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까?’ 우리 의료 환경에서는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명은 씨는 이 고민을 스스로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수년간의 페이닥터(봉급의사) 생활 이후 어렵사리 시작한 전공의 과정을 그만두고 가정집에서 자신만의 작은 진료실을 열기로 한 것이다. 》

○ 집보다 편안한 병원


지난해 11월 명은 씨는 서울 성북동에 작은 진료실 ‘성북동91번지의원’을 열었다. 원래 가정집이었다가 한때 요양원으로 사용됐던 곳이어서 동네 의원이 들어서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동네 의원임을 강조하고 싶어 이름도 주소 그대로 붙였다. 최근 인구가 줄어드는 곳이기에 초짜 의사가 병원 경영을 하기엔 그리 좋지 않은 환경이다. 하지만 명은 씨는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고, 당장 찾는 환자 수는 적더라도 한 명의 환자라도 제대로 돌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기에 동네 의원을 열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병의 치유는 곧 환자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이라는 명은 씨의 강한 신념은 성북동91번지의원이라는 공간을 통해 잘 드러난다. 2월 27일 취재진이 방문한 이 의원은 외관부터 달랐다. 대로변 화려한 빌딩에 자리 잡은 요즘 의원들과 달리 오랜 동네 골목에 자리한 회색빛 2층짜리 가정집이었다. 화려한 간판도 없다. 명은 씨가 직접 만든 나무 간판과 현수막만 그곳이 의원임을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환자는 하루에도 많게는 스무 명씩 꾸준히 방문한다. “젊은 여의사가 적어도 10분 이상씩 진료하고 병이 잘 낫는다”는 입소문의 힘이 컸다. 미세먼지 탓에 요즘은 감기 환자가 많다.

2층 양옥 가정집을 개조한 성북동91번지의원. 그래서인지 환자들은 “우리 집처럼 편안한 기분을 느낀다”고 말한다. 1층은 의원 대기실과 진료실로, 2층은 최명은 원장의 거주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2층 양옥 가정집을 개조한 성북동91번지의원. 그래서인지 환자들은 “우리 집처럼 편안한 기분을 느낀다”고 말한다. 1층은 의원 대기실과 진료실로, 2층은 최명은 원장의 거주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더 주목할 만한 건 의원 내부 디자인. 의원보다는 카페에 가깝다. 가정집 거실을 개조한 환자 대기실엔 환자들이 간단한 요리와 다과를 직접 해먹을 수 있는 부엌과 원두커피 머신까지 갖췄다. 웬만한 도서관을 연상케 하는 서재도 갖춘 탓에 병원이 동네 학생들의 공부방으로도 활용된다. 이날 오후 병원에서 공부하며 허드렛일까지 거들던 정진택 군(17)은 “강아지도 돌보고 재밌는 책도 읽으려고 가끔 찾아온다”면서 “몸에 난 병만 고치는 일반적인 의원들과 달리 이곳은 마음까지 안정시킬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이 의원의 리모델링을 담당한 건축가 유운형 씨는 “성북동91번지의원은 옛날 약방이나 동네 의원처럼 그 동네 주민들의 쉼터이자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면서 “오래된 의원의 모습이지만 주민과 밀착된 풀뿌리 의료가 이뤄지는 대안적 모델”이라고 강조했다.

○ 최소한의 예산으로 병원 운영

성북동91번지의원의 또 다른 특색은 ‘사실상’ 24시간 진료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올겨울 명은 씨가 병원 2층으로 아예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이후 의사가 병원에서 산다는 소문이 나면서 늦은 밤에도 아픈 환자들이 이곳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의사 혼자서 24시간 진료를 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 하지만 명은 씨는 “찾아오는 환자들을 의사가 어찌 마다할 수 있나요”라면서 “오히려 함께 얘기를 나누며 병의 원인을 찾고 편안해지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면 새벽에도 힘이 난다”고 말했다.

명은 씨는 “사실 의원의 자금 운영이 그리 쉽진 않은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자세한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매달 적자만 면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인건비 절감을 위해 간호사도 없이 일하지만 밥 지을 쌀이 떨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주변의 도움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사정을 눈치챈 명은 씨의 대학 후배들, 자원봉사자 그리고 동네 주민들이 스스로 나서 사무, 허드렛일, 각종 의료비품 문제까지 해결해줬다. 이들 모두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병원에서 2차례나 음악회를 열었다.

명은 씨는 “성북동91번지의원의 성공 여부는 앞으로 1년을 어떻게 버티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면서 “환자와 의사의 신뢰 회복을 통해 작은 개인 의원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힘줘 말했다.

※‘우리 동네 착한 병원’의 추천을 기다립니다. 우리 주변에 환자 중심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병원이 있으면 이름과 추천 사유를 동아일보 복지의학팀 e메일(health@donga.com)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철호 기자 irontiger@donga.com

▼ [선정위원 한마디]“간호사 없이 의사의 24시간 진료체계는 무리”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편안한,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활력 넘치는 공간을 만들자는 성북동91번지의원의 작은 실험을 두고 착한 병원 선정위원들은 모두 “지역사회 밀착형 병원의 좋은 사례”라고 입을 모았다. 성북동 주민들의 주치의로 활동 중인 최명은 원장의 활동이 앞으로 1차 의료기관이 살아갈 수 있는 대안적 사례로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성도 의외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미국 듀크대 경영학석사(MBA) 출신인 배지수 서울와이즈요양병원장은 “원장이 병원에 직접 거주하면서 집세와 병원 임대료를 한꺼번에 부담할 수 있다는 점이 경영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상 지속되고 있는 24시간 진료에 대한 우려 섞인 목소리도 나왔다. 장동민 전 대한한의사협회 대변인은 “24시간 진료체계는 의사의 큰 희생이 있어야 가능하다”면서 “인건비 절약을 위해 병원의 모든 일을 의사 한 명이 떠맡는 것은 다소 가혹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주 선정 위원회에는 새벽진료를 전문으로 하는 서울의 한 치과도 착한병원 후보군에 올랐지만 ‘스케일링 무료 쿠폰’ 지급 등 불법 환자 유인 행위가 알려져 제외됐다. 김세진 서울시치과의사회 홍보이사는 “당장 환자 위주의 편의를 제공하는 의료기관이라도 현행법을 위반하는 의료기관은 선정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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