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분쟁 25시]의료분쟁의 블랙박스 ‘진료기록지’

  • 입력 2009년 5월 11일 02시 57분


선천성 심장병을 고치려다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A 군.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을 해보니 뇌가 망가져 있었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기 전 뇌에 산소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것이다. A 군의 부모와 경북대병원은 이 사건을 대법원까지 끌고 갔다.

기록조작-과실 의혹 눈초리

2008년 7월 24일 대법원은 병원 진료기록의 허점을 지적하며 사건을 고등법원에 환송했다. 환자에게 ‘저산소성 뇌손상’이 일어났는데 진료기록에 산소포화도 모니터 결과가 없으므로 이 부분을 확실히 해서 다시 판단하도록 한 것이다.

A 군은 수술 후 6일 동안 중환자실에 있었다. 병원이 제출한 진료기록에는 이 기간에 혈중 산소포화도 모니터 결과가 빠져 있었다. 뇌가 산소 부족 때문에 손상됐고 이에 앞서 산소 감소를 시사하는 임상상태가 있었을 터인데 그것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가 빠진 셈이다.

자료 누락 이유는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검사를 하지 않았거나, 검사를 했지만 기록을 하지 않았거나, 검사를 하고 기록도 있지만 검사 결과가 공개되면 불리해지니 누락시킨 것이다.

첫 번째 경우라면 의료과실이다. 세 번째 경우라면 진료기록 조작이므로 ‘입증 방해’에 해당한다. 두 번째 경우라면 병원이 모니터링 결과지를 찾아 제출하면 된다. 대법원은 세 가지 가능성 중 어느 것이 맞는지 고등법원에서 다시 판단하도록 한 것이다. 이 사건은 고법에서 재심 중이다.

대법원의 결정에는 ‘진료기록이 조작됐을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의료인이 진료기록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꿔놓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진료기록지를 접하는 대부분의 환자도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나중에 바꿔 써놓지 않았을까”라고. 이는 의료인만이 진료기록의 작성·수정·보관에 대한 독점권이 있고, 따라서 남몰래 고쳐놓는 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진료기록 조작 우려는 간혹 현실화되기도 한다. 그래서 의료소비자시민연대는 “진료기록지를 빨리 손에 넣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만일 진료기록지가 조작됐다면 의료소송에서 승소하기는 불가능할까. 꼭 그렇지는 않다. A 군의 경우처럼 말이다. 병원이 기록 누락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는 이상 A 군은 승소할 가능성이 높다. 또 손으로 진료기록을 쓰는 병의원에서는 진료기록의 글자체 모양이나 크기, 문장의 위치와 형태, 필기구 특성 등을 고려해 사후 추가 기입했는지 여부를 알아낼 수 있다. 진료기록을 컴퓨터로 기입하는 ‘전자차트’라면 이런 추론이 불가능하지만 서버에 남아있는 ‘로그기록’을 확인해볼 수 있다.

기록지는 분쟁 시작이자 끝

진료기록지는 ‘의료분쟁의 시작이자 끝’으로 불린다. 중요한 만큼 진실하게 작성하고 보관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료기록지의 조작 가능성에 대해 “의료인을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고 간다”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내과의사 출신인 이동필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선량한 의사마저 피해자로 만드는 것은 바로 ‘감추고 은폐하려는’ 의료계의 관행”이라고.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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