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통화 시대지만 미지와 접속하는 맛 HAM만 할까요?

  • 입력 2008년 3월 5일 02시 58분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햄으로 교신할 때 사용하는 각종 무선통신기기들. 이런 통신기기들을 모두 갖추려면 평균 150만 원 정도 든다. 사진 제공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햄으로 교신할 때 사용하는 각종 무선통신기기들. 이런 통신기기들을 모두 갖추려면 평균 150만 원 정도 든다. 사진 제공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무선통신으로 사랑을 교신하는 사람들

“CQ… CQ… 응답 바랍니다”

지구 반대편과의 짜릿한 교신

국내 20만명이 흠뻑

마니아 가족도 많아

“한국 첫 우주인과

다음달 교신 설레요”

“CQ! CQ! 여기는 ‘DS1IYZ’입니다. 주파수 체크합니다.”

“DS2CFQ입니다. 반갑습니다. 의정부에는 황사가 심하네요.”

3일 저녁 서울 강북구 수유동 한 가정집. 이선이(39·여) 씨가 한 손에는 마이크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주파수를 맞추며 호출부호를 외친다.

CQ는 ‘누구라도 응답 바란다’라는 뜻의 통신용어. DS1IYZ는 개인에게 부여되는 호출부호(ID에 해당)다. DS는 한국, 1은 서울, IYZ는 개인별 자격증 번호다.

남편 박연하(46·회사원) 씨, 딸 수진(14) 양, 아들 희원(12) 군도 이 씨 옆에서 교신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들은 아마추어 무선 통신자격증을 취득한 ‘햄(HAM·아마추어 무선)’ 가족이다. 햄이란 용어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아마추어무선국을 만든 세 사람의 성(Hyman, Almay, Murry)에서 유래했다. 햄은 개인적으로 무선기기와 안테나를 설치, 전파를 이용해 통신을 하는 ‘아마추어 무선’을 뜻한다. 아마추어 무선사도 햄이라고 부른다. 박 씨는 햄에 열중하는 아내를 보면서 “1990년대 중반 내가 햄을 시작했을 때 ‘그걸 왜 하느냐’며 핀잔을 주더니 지금은 나보다 더 좋아한다”면서 웃었다. 이 씨는 1990년대 후반, 수진 양은 2003년 햄 자격증을 땄다. 희원 군도 준비 중이다.

이 씨는 “매일 저녁 햄을 하면서 미지의 대상과 교신한다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가족 간 유대감도 깊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수진 양은 “햄을 하면 발음이 또박또박해지고 발표에 자신감이 생긴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통신이 주는 매력

초고속 디지털 시대지만 햄은 여전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00년 개봉된 영화 ‘동감’에는 배우 유지태가 김하늘과 햄으로 교신하며 사랑을 키워 가는 모습이 소개되기도 했다. 국내의 햄 인구는 약 20만 명에 이른다. 지역별 동호회 활동도 활발하다. 무선인터넷, 영상통화 등 첨단기술이 날로 개발되는 시대에 왜 사람들은 ‘구닥다리’ 아날로그 햄에 애착을 느낄까.

햄 경력 15년의 유재복(51·회사원) 씨는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와 만나는 설렘, 나만의 전파를 지구 반대편으로 보내는 흥분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고 말한다. 아마추어 무선사들은 “햄만큼 중독성이 강한 통신활동도 없다”고 입을 모은다. 햄의 재미에 빠진 사람들은 어려운 전파 관련 서적을 독파하고 안테나와 장비 다루는 법에 대해 즐겁게 공부한다. 햄의 고수들은 재미삼아 햄의 언어체계인 ‘모스부호(Morse Code)’로 일반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딱딱’ ‘따다닥’ 하는 소리로 들리지만 이들은 “모스부호로 충분히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 재난 시 통신수단으로 유용

1년 전 박정순(52·일본어 강사) 씨는 바로 눈앞에서 자동차 사고를 목격했다. 마침 휴대용 햄 기기를 가지고 있던 박 씨는 ‘구급차를 빨리 보내 달라’는 햄 교신을 해 부상자를 구할 수 있었다.

햄은 긴급 상황 때 위력을 발휘한다. 휴대전화 등 기지국을 이용한 통신기기와 달리 햄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발신국이자 송신국이다. 통신시설이 파괴되면 기존 통신기기는 무용지물이 되지만 햄은 건전지만 있으면 어디서든 통신이 가능하다. 동일 주파수대에서는 다수가 통신이 가능하다. 미국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에서는 외계인의 공격으로 모든 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햄으로 통신하는 장면이 나온다.

김형수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부이사장은 “햄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 재난 시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통신수단”이라고 강조했다.

○ 한국 최초 우주인 고산 씨와 햄 교신

햄의 매력은 안방에 앉아 전 세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전파를 전리층에 쏘면 반사되면서 지구 모든 곳에 전파를 보낼 수 있다. 윤상용(44) 씨는 “햄을 통해 러시아 남극기지의 알렉스라는 연구원과 교신하며 흥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국내 햄들은 우주와 교신하려는 계획도 진행 중이다. 올해 초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은 미국항공우주국(NASA)과 러시아항공우주국(RASA)에 의뢰해 국제우주정거장과 국내 아마추어 무선사 간의 햄 통신 계획을 성사시켰다.

이 계획에 따라 다음 달 초 한국 최초의 우주인 고산 씨는 우주에서 햄을 통해 경기 평택시 한광고에 모인 전국 아마추어무선국 동아리 학생들과 교신할 예정이다. 우주정거장이 한반도 상공을 지나는 15분 동안 교신이 이뤄지게 된다.

NASA와 RASA는 한국 아마추어무선사들을 배려해 우주정거장 궤도를 수정했다. 교신 시간을 한국 시간으로 오전 2시에서 오후 8시로 옮기기 위해서다.

한광고 3학년 박재훈(18) 군은 “우주에 있는 누군가와 교신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설렌다”면서 “고산 형에게 무중력 상태에 있는 기분이 어떤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햄 관련 단체 및 장비 구매처
단체 및 장소 내용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www.karl.or.kr)
햄 정보, 교육, 동호회 활동, 해외 햄과 교류
구로중앙유통상가
용산전자상가
무선통신기기, 전원공급장치, 안테나 등 각종 햄 장비 갖춤.
150만 원대에서 신제품 완비 가능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사이트 내
중고장터 게시판
회원 간 중고 햄 장비 거래. 50만 원대에서 중고품 완비 가능

■ 아마추어 무선사 되려면

전파법규 등 시험 통과해야

집에서 햄을 하려면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일단 아마추어 무선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격증이 필요하다. 한국전파진흥원에서 실시하는 아마추어무선사 국가기술자격증 시험을 치러야 한다. 시험은 3월과 10월에 열린다. 과목은 무선공학, 전파법규, 무선기기취급법 3과목으로 이뤄지며 이 중 2과목에서 합격해야 한다.

시험이 부담스럽다면 사단법인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에서 개최하는 무선기기취급법, 무선공학 수업을 15시간 이수하면 된다. 이 경우 한 과목(전파법규)만 시험을 보면 된다.

시험에 통과하면 자신만의 호출부호를 부여받는다. 호출부호는 교신할 때 어느 지역, 누구인지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햄 기본 장비인 안테나, 무선기기, 전원공급 장치는 용산전자상가, 구로중앙유통상가 등에서 구입할 수 있다. 교신에 필요한 장비를 모두 갖추려면 150만 원 정도 든다. 안테나는 지붕이나 아파트 옥상 중앙에 설치하는 것이 수신과 송신에 유리하다. 국외용 통신기기는 따로 구입해야 한다.

교신은 마이크를 통해 대화를 하는 ‘전화 방식’과 모스부호로 교신하는 ‘전신 방식’으로 나뉜다.

전화 방식은 통신기기를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듯 특정 주파수에 맞춘 후 이 주파수로 들어온 상대방과 일반 전화를 하는 것처럼 마이크를 통해 대화를 나눈다.

전신 방식은 목소리 대신 손가락으로 모스부호 전신기를 똑똑 두드려 언어를 만들어서 상대방에게 보낸다. ‘길게 짧게 길게’ 두드리면 ‘O’ ‘짧게 길게’는 ‘ㅏ’ ‘짧게 길게 짧게’는 ‘ㄴ’이 돼서 ‘안’이란 글자가 완성되는 식이다. 부호를 빨리 치고 잘 알아들을수록 햄의 고수다.

교신할 때는 나이와 상관없이 존댓말을 사용한다. 같은 주파수대에서 모두가 듣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에 송수신이 가능한 일반 전화와 달리 송수신이 일방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대화를 끝낼 때는 자신의 호출부호를 마지막에 붙여준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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