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8년 2월 13일 02시 50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혹시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단순 덧셈 뺄셈을 할 때도
계산기를 찾거나 가족들 전화번호도 머릿속이 아니라
휴대전화에 저장해 놓으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디지털 치매’의 위험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자기기에만 의존하다 보면 머리 쓰는 노동을
‘안 하는 사람’이 아니라 ‘못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릴지 모른다.》
은행에 다니는 오민영(32) 씨는 직업상 계산하는 업무가 많다. 정확한 계산을 위해 계산기를 자주 이용하다 보니 간단한 덧셈 뺄셈조차 계산기가 없으면 불안하다. 최근 그는 단순 사칙연산을 되풀이하는 게임을 시작했다. 어느 순간 계산기 없이 암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두뇌 트레이닝’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 “머리 쓰면서 쉰다”
휴식이나 취미 활동은 보통 머리를 식히기 위한 것이지만 최근에는 거꾸로 머리를 쓰면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두뇌 트레이닝’은 운동으로 체력을 기르는 것처럼 두뇌를 훈련시켜 사고력과 기억력을 기르는 것이다.
머리 쓰는 게임의 대표 주자는 ‘스도쿠’다. 한 변이 9칸인 정사각형의 가로 세로 칸(총 81칸)에 1부터 9까지 숫자를 한 번씩만 써 넣어 빈칸을 모두 채우면 한 게임이 끝난다. 숫자들은 상하좌우로 겹치지 않아야 한다.
언뜻 보면 쉬운 듯하지만 난도가 높은 스도쿠는 하루 종일 매달려도 풀지 못할 만큼 어렵다. 1980년대 일본의 한 퍼즐회사가 개발한 이 게임은 3, 4년 전 국내 신문과 잡지에 소개되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스도쿠 마니아인 김윤걸(32·출판사 근무) 씨는 “어려운 스도쿠 한 개를 완성했을 때의 쾌감은 등산을 하거나 운동한 후 샤워할 때의 개운함보다 더 짜릿하다”고 말한다. 그가 운영하는 인터넷카페 ‘아이러브스도쿠(cafe.naver.com/ilovesudoku)’는 회원이 9만여 명이나 된다.
두뇌 훈련 마니아들이 무조건 전자기기를 멀리 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일본의 한 게임회사가 개발한 ‘두뇌 트레이닝’ 휴대용 게임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게임기와 타이틀 2, 3개를 구비하려면 20만 원이 훌쩍 넘지만 나이에 상관없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 게임은 사칙연산, 단어 암기 등으로 구성돼 있다. 원래 어린이와 20, 30대 젊은 층을 위해 개발됐지만 치매에 걸릴까 걱정하는 노년층에서도 사용 인구가 늘고 있다.
인터넷 카페 ‘닌사모’(nintendouser.com)의 열성 회원인 대학생 박준철(26) 씨는 “현대인은 가족이나 친구의 전화번호도 휴대전화에 저장하고, 자주 가는 길도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다 보니 머리를 점점 쓰지 않게 된다”면서 “애써 머리를 쓰려고 하는 우리 같은 사람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의 반항아’인 셈”이라고 말했다.
○ “일 시작하기 전 준비운동… 집중력 늘어요”
스도쿠, 휴대용 두뇌게임 등을 즐기다 보면 여러 가지 ‘경우의 수’나 대안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계획 수립 능력과 인지적 융통성을 키울 수 있다. 또 충동적으로 대처하면 게임을 망치게 되므로 행동억제력과 집중력도 생긴다.
‘아이러브스도쿠’ 회원인 회사원 박건신(27) 씨는 “스도쿠와 퍼즐 덕에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초등학교 1, 2학년 때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 못해 여러 차례 전학을 가야 할 정도로 산만한 어린이였다. 그러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월리를 찾아라’라는 숨은그림찾기 책에 빠진 이후 집중력이 크게 늘었다. 그는 “지금은 한번 자리에 앉으면 몇 시간 동안 일어나지 않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찬찬히 생각하며 퍼즐을 풀어가다 보면 어수선한 마음이 가라앉고 머리가 맑아져 업무 효율도 높아져요.”
두뇌 훈련을 즐기는 사람들은 “방에 처박혀 게임에만 몰두할 것이라는 선입견은 버려 달라”고 말한다. 스도쿠 마니아 손호성(38) 씨도 정기적으로 ‘릴레이 스도쿠’ 모임에 참가한다. 그는 “여러 명이 모여 스도쿠를 풀면서 ‘이런 방식으로 숫자를 배열하면 더 흥미롭지 않을까’ 하는 식의 토론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사람 사는 일은 정답이 없고 예측이 불가능하지만 두뇌게임에는 반드시 하나의 정답이 있고, 정답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힌트가 있습니다.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해답을 찾아간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게임을 접했을 때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안정감과 위안을 얻게 됩니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이 기사의 취재에는 본보 대학생 인턴기자 장용욱(25·한국외국어대 영어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끝말 잇기… 노래 거꾸로 부르기… 카드 숫자 외우기…
게임기 없다고 두뇌게임 못 하나요
어린이들은 꾸준히 두뇌훈련을 하면 머리가 좋아질 수 있다. 그러나 지능 발달 과정이 이미 끝난 성인은 두뇌훈련을 통해 지능지수(IQ)를 높이기보다는 퇴화를 막는 데 주력해야 한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치매를 방지하기 위해 생전에 매일 아침 30∼40분씩 산 이름을 외운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스도쿠나 게임기 없이도 평소에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두뇌 훈련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는 끝말 이어가기, 동요 거꾸로 부르기 등 널리 알려진 게임을 추천한다.
‘산토끼 토끼야’로 시작하는 동요 ‘산토끼’를 ‘끼토산 야끼토’로 거꾸로 부르거나 끝말 이어가기를 하면 단기 기억력과 언어조작 능력을 키워 준다.
여러 장의 카드를 쭉 보여 주고 덮은 다음 보여 준 카드의 숫자와 종류를 맞히거나 숫자가 큰 순서대로 기억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적당히 하기만 한다면 고스톱도 치매 방지에 도움이 된다. 상대의 패를 보면서 상대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다음 행동은 무엇일지 예측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게임을 이끌어가는 행위는 상당한 두뇌 활동을 필요로 한다.
어린이들에게 ‘토끼와 거북이’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토끼’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박수를 치게 한다. 집중력과 행동억제력을 키울 수 있다.
그러나 게임을 너무 오래 하면 곤란하다. 특히 어린이의 경우 게임 시간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양한 감각을 익혀야 하는 시기에 게임에만 몰두하다 보면 다른 감각을 익힐 기회를 놓칠 수 있다. 신민섭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는 “꾸준히 두뇌훈련 게임을 하면 기억력과 집중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면서 “게임 시간은 30분∼1시간 정도가 좋다”고 충고했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