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 낸 현실이 현실을 바꾼다

  • 입력 2007년 11월 9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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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붉은 나무탁자 위에 투명한 유리컵 하나가 놓여 있다. 누군가 맥주병을 기울이자 하얀 맥주 거품이 컵 안을 가득 휘감는다. 무슨 새 맥주 광고인가 하겠지만 실은 8월 미국에서 열린 세계 최대의 컴퓨터그래픽(CG)학회 ‘시그라프 2007’에 선보인 가짜 맥주 영상이다. 이달 2일 대전 유성구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다시 본 맥주 영상은 진짠지 가짠지 모를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관객의 까다로운 눈을 속이며 ‘사실감(리얼리티)’에 도전하는 국내 첨단 기술이 최근 주목을 받고 있다. 이 기술은 다른 산업에 응용되면서 인간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기도 한다.》

○ 홍수 예측 모델로 맥주 따르기 감쪽같이 재현

시그라프에서 발표된 가짜 맥주 영상은 ETRI와 호주 연방과학산업연구협회(CSIRO)가 함께 만들었다. 원래 CSIRO가 홍수 피해를 예측하기 위해 만든 수학 모델을 CG에 적용한 것이다.

CSIRO의 지원을 받은 호주 모내시대 수학과 조 모나한 교수는 1994년 물처럼 흐르는 작은 알갱이 집단의 움직임을 분석한 수학 모델을 내놨다. 물을 작은 알갱이 단위로 분석하면 더 정교한 물길의 흐름과 운동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물 분자들은 서로 끌어당기기도 하고 밀어내는 성질도 있다. 또 딱딱한 컵에 부딪치거나 바람처럼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거나 주기도 한다. 이들은 물의 운동 특성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다.

컵에 맥주를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 맥주 분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끌어당기거나 미는 힘이 작용하기도 하고, 서로 힘을 주고받기도 한다. 맥주를 따를 때 결국 컵 안에서는 작은 홍수가 일어나는 셈. 맥주의 생생한 움직임을 재현하려면 이처럼 컵에 떨어지는 맥주 알갱이 하나하나의 운동을 살펴보면 된다. 현재까지의 기술로는 맥주에 녹아 있던 작은 탄산 기포가 다른 거품과 결합하며 점점 커지는 모습까지 재현이 가능하다.

○ 맥주 컵 속에 일어난 작은 홍수로 해일 예측

ETRI 컴퓨터그래픽기반기술연구팀 구본기 팀장은 “이 모델에서 맥주 입자를 물 입자나 티끌로 바꿔 적용하면 물보라나 흙먼지처럼 변화무쌍한 장면 연출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CSIRO와 ETRI는 내년 개봉을 목표로 추진 중인 한중합작영화 ‘삼국지 용의 부활’편에 등장하는 말발굽 먼지에도 이 모델을 적용할 계획이다. 상업광고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과학의 수혜로서 디자인이나 영화 제작, CF에 쓰이던 CG 기술이 이제는 오히려 과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활용되고 있다. 사실감 높은 수학 모델을 찾는 과정에서 그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다양한 자연현상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제 숫자로 된 자료 대신 실제와 거의 같은 상황을 CG를 통해 미리 경험한다.

보잉과 에어버스 같은 항공기 제작사 설계자들만 해도 초음속 비행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할지 모를 충격파와 기체 결함을 찾는 데 CG 실험을 활용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지진해일(쓰나미)이나 허리케인, 지진 같은 환경 재앙을 예측하는 분야에서 사용하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다.

지난해 7월 17일 인도네시아 자바 섬 등을 강타한 지진해일의 경우 리히터 규모 7.7의 강진 직후 미국지질국(USGS)은 비교적 정확하게 피해 지역을 예측했다. 지진이 일으킨 강력한 해일의 움직임과 이동 경로, 피해 지역을 예측하는 데 CG가 활용된 것.

이 외에도 혈류 움직임을 정확히 포착해야 하는 인공심장 제작이나 공기 흐름을 예측해야 하는 터널 건설에도 활용되고 있다.

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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