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의 빛나는 조연 ‘바이오테크니션’의 세계

  • 입력 2006년 10월 20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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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안전성평가연구소 양병철 팀장은 오늘도 어김없이 쥐와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쥐 몸무게를 재고 건강상태를 꼼꼼히 기록한 다음 팀원들을 부른다. “곧 대규모 생쥐 실험을 시작합니다. 한 명이 족히 수백 마리의 쥐에게 약물을 투여해야 해요. 동물실 온도와 습도를 정확히 조절하고, 사료와 물도 충분히 확보하세요.” 연구소에서 양 팀장의 역할은 ‘바이오테크니션(biotechnician·테크니션)’. ‘연구원’ 하면 보통 석사나 박사급 인력만 생각하기 쉽다. 연구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데이터가 테크니션의 손을 거쳐 나온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연구원이 실험의 ‘주연’이라면 테크니션은 ‘조연’인 셈. 조연이 역할을 못하면 영화나 드라마가 밋밋해진다. 생명과학계에선 조연이 없으면 연구 전체에 차질이 생긴다.》

● 실험장비 조작 등 실무 담당

연구원은 아이디어를 내고 연구 방향을 제시하는 큰 흐름을 주도한다. 테크니션은 실험장비를 조작하고 실험동물을 관리하면서 정확한 데이터를 만들어 내는 실무 담당자다.

양병철 팀장은 “연구소 동물실험의 85% 이상을 테크니션이 담당한다”며 “최소 6개월 이상 교육을 받고 인증시험을 통과해야 직접 동물을 다룰 수 있다”고 말했다. 약물을 투여하거나 심지어 몸무게를 재는 절차와 방법까지도 정해진 규칙(SOP)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줄기세포 연구실에서 우의처럼 생긴 실험복을 입고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세포를 직접 다루는 사람들의 역할도 바로 테크니션. ‘손기술’이 뛰어난 테크니션은 포도알 짜듯 세포에서 핵을 빼내는 등 독창적인 실험기법을 스스로 창안해내기도 한다.

기업의 공장과 연구소에서도 테크니션이 활약한다. OB맥주 청원공장 송창욱 과장은 입사 초기에 맥주에 해로운 미생물이 들어갔는지 검사하고 맥주의 맛과 향에 영향을 주는 성분을 분석했다”며 “복잡한 기기의 원리나 작동법 숙지는 물론 유지보수까지 맡았다”고 했다.

대웅제약 연구소는 전체 연구 인력의 약 10%가 테크니션이다. 박승국 상무는 “동물이나 미생물 등 생명체를 직접 다룰 때는 종종 예측 못한 비상 상황이 생긴다”며 “빠르고 정확히 판단해 대처하려면 테크니션의 오랜 경험과 노하우가 필수”라고 말했다.

● 생쥐 약물투여-현미경 손기술 척척

미국에는 주마다 테크니션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대학이 한 곳씩 있다. 일본에는 테크니션을 양성하는 2∼3년제 대학이 6곳 있다. 그러나 국내 전문가들은 “한국 대학의 생명과학 교육은 실험보다 이론 비중이 큰 데다 비싼 실험실습 장비 확보도 쉽지 않다”고 지적한다.

현재 국내에서는 식품이나 화공계열, 임상병리 등을 전공한 2년제 대학 졸업자나 실업계 고교 출신이 테크니션으로 일하고 있다. 아직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가 많지만 정규직 채용이 늘고 있는 상황.

연구보조원, 기술기능원으로 불리다 최근에는 전문연구원, 전문기술원 등 전문성을 인정하는 직함을 주는 추세다. 이에 국내에도 테크니션을 전문적으로 길러내자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충남 논산시에 한국폴리텍바이오대학이 설립돼 지난 3월 첫 입학생을 받은 것.

이 학교 오광근 교학처장은 “크로마토그래피(이동 속도 차이를 이용해 시료 성분을 분리하는 장치), 미생물발효기, 세포배양기 등 첨단기기를 다량 보유해 숙련도 높은 테크니션을 양성할 계획”이라며 “졸업할 학생 85%가 취업이 예정돼 있다”고 말했다.

● 논산에 국내 첫 전문인 양성 대학

바이오배양공정과 권영범 씨는 “일반 대학에서는 3학년이나 석사과정에 들어가야 직접 세포나 미생물을 다루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입학하자마자 배양기술을 배운다”고 말했다.

한 학기 동안 배운 ‘알짜배기’ 기술로 권 씨는 방학 동안 생명공학회사에서 약품 제조 실습을 했다. 그는 “급여뿐 아니라 졸업하면 같이 일하자는 제의도 받았다”고 귀띔했다.

한 생명과학 연구자는 “간혹 오래 일한 테크니션이 갓 입사한 연구원의 실험에 잘 협조하지 않는 난감한 경우도 있다”고 털어 놓았다.

한국폴리텍바이오대 장재선(바이오생명정보과) 교수는 “테크니션은 ‘잡일’이나 ‘뒤치다꺼리’를 한다는 인식이 아직도 남아 있다”며 “한국에선 몇 년씩 걸리는 연구가 미국에선 1년에 끝날 수 있는 것도 전문적인 테크니션이 잘 양성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임소형 동아사이언스기자 soh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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