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범죄 잡는 ‘보이지 않는’ 기술들

  • 입력 2006년 4월 2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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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야심한 밤 한국 첩보요원 K는 은밀히 부산항에 정박된 배 안에 잠입했다. 조심스럽게 좌우를 살피는 K. 곧이어 재빠른 손놀림으로 작은 상자를 배낭에서 꺼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넣는다. 몇 시간 뒤 선박은 조용히 새벽안개를 가르며 유유히 공해로 나아갔다. 같은 시각 K가 근무하는 청사 안에 마련된 작전실 화면에는 선박 위치가 시시각각 보고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선박은 포위망을 서서히 좁혀 온 해군과 해경 경비정에 붙잡힌다.》

톰 크루즈가 등장하는 첩보영화 속 장면이 아니다. 지난해 4월 국가정보원(원장 김승규)이 국내 산업 기술을 빼내려는 일당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추적 장치가 사용됐다. 산업 스파이와 이를 쫓는 국정원 요원 사이의 추격전에서 영화 속에나 등장할 첨단기술이 사용되고 있다. 다만 범인에 대한 정보를 수사기관에 넘겨 주고 손을 떼기 때문에 국정원의 역할은 일반인에게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이다.

○ 디지털 범죄 대응 특수부 운영 중

본보가 최근 국정원에서 제공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03년 6건에 머물던 기술유출 사건 검거 실적이 2004년 26건, 2005년 29건으로 급격히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 예방액을 추산하면 82조 원에 이른다.

산업스파이들이 노리는 범죄 대상은 디스플레이 장치에서 신형 휴대전화, 메모리, 초음파진단기, 음식물 쓰레기 처리장비까지 광범위하다. 초박막트랜지스터액정표시장치(TFT-LCD)나 메모리, 스마트폰 등 한국이 세계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는 기술은 밀거래 품목 1순위를 차지한다. 이처럼 범죄 대상이 첨단이다 보니 수사기법도 첨단을 좇는다.

최근 산업스파이들은 노트북, 메모리스틱, 외장형 하드디스크, 개인 간 파일 공유(P2P), DVD 등 다양한 정보 매체를 범죄에 악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정보가 A4용지로 200∼300만 장 분량에 해당하는 수십 기가바이트(GB) 규모이고 자료를 은닉하기 쉽기 때문이다”고 국정원 측은 분석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유럽식(GSM) 스마트폰 기술을 해외로 유출하려다 적발된 범인들도 A4지 100만 장 분량의 정보를 DVD와 e메일로 빼돌렸던 것으로 조사 결과 드러났다.

문제는 디지털 저장매체를 활용한 범죄를 수사하기가 꽤 까다롭다는 것. 검거에 대비해 기계를 부수면 증거가 쉽게 인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정원도 영화 007에서 제임스 본드에게 첨단 첩보장비를 제공하는 특수연구소와 유사한 부서를 설립해 수사에 필요한 기술과 장비를 자체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자체 개발 암호화 e메일로 연락

지난해 4월 국가정보원 요원이 밀수출 선박에 위성추적장치를 설치해 해상 추격전을 벌인 사실이 최근 공개됐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주요 기관의 사내 블로그나 게시판도 국정원의 정보수집 창구로 활용된다. 해외여행이 갑자기 잦아진 전직 직원과 이들과 연락을 자주 취하는 현직 직원은 의심 대상 1순위. 국정원은 산업기술 유출의 95%가 전현직 직원에 의해 벌어진다고 파악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e메일 감시다. 국내 대기업들과 주요 연구기관들은 기술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e메일을 감시하는 보안솔루션을 ‘비공식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국정원 요원의 경우 ‘보이지 않는 적’의 감시에 대비해 자체 개발한 암호화 프로그램을 통해 메일을 주고받고 있다. 그림 속에 글자를 숨기는 알고리듬인 ‘스테가노그래피’라는 암호기술도 그 중 하나다. 별도의 해독 프로그램이 없으면 아무도 의미를 알 수 없다.

국내 산업스파이 사건 가운데 75%가 정보기술(IT) 관련 기업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다. 사진은 경찰이 산업스파이에게서 압수한 하드디스크. 동아일보 자료 사진

과학기술부는 첨단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2015년까지 ‘디지털 포렌식’ 기술을 개발할 계획이다. 디지털 포렌식이란 정보매체 안에 남은 범죄 증거를 찾아내는 수사기술로 최근 각국 수사기관들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연구 계획에는 파괴된 하드 디스크의 완전 복구, 휴대전화기에 남은 증거 포착, 용의자의 e메일과 계정 비밀번호를 푸는 첨단 기법이 포함돼 있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실제로 국제 마약 범죄와 산업스파이 수사나 검거작전에는 GPS 추적 장치 외에도 밝힐 수 없는 비밀장비들이 사용되고 있다”며 “기술유출 방식이 지능화되면서 요원들의 수사 방식이나 장비들도 실제로 과학화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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