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기가 꿰뚫어본 천문과학 탄생200돌 맞아 재조명 활발

  • 입력 2003년 11월 18일 18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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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기가 1834년 제작한 ‘지구전후도’의 일부. 중국에서 1800년경 만들어진 최신의 양반구형 세계지도를 모사해 이를 김정호가 목판에 새겼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 목판본이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최한기가 1834년 제작한 ‘지구전후도’의 일부. 중국에서 1800년경 만들어진 최신의 양반구형 세계지도를 모사해 이를 김정호가 목판에 새겼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 목판본이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대단하도다, 지구설이여! 천지의 정체를 밝혔고, 1000년을 이어온 긴 몽매를 일깨웠도다!”

1836년 서울 숭례문 부근, 한 선비가 새로운 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기쁨에 무릎을 치며 글을 써내려 갔다. 당시까지 조선의 많은 학자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선비는 달랐다. 그는 서양인 카노가 세계를 한 바퀴 돌아 출발점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책에서 발견했다. 그렇다면 분명 지구는 둥글다는 점이 입증된 셈. 선비는 경탄을 금치 못하고 ‘지구설’을 담은 서적 ‘기측체의(氣測體義)’를 완성시켰다. 그의 이름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혜강 최한기(惠崗 崔漢綺·1803∼1877).

200년 전 오늘(음력 10월 26일) 탄생한 혜강을 기념해 학계에서는 그의 기학(氣學) 사상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혜강은 17세기부터 조선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서양의 과학을 자신의 사상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해석해 독창적인 기학 사상을 전개한 인물이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문중양 교수(과학사)는 “혜강은 요즘 표현으로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통합할 새로운 학문체계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 학자”라며 “그 해답을 우주에 충만한 기(氣)의 원리에서 찾으려 했다”고 말했다.

한 예로 혜강은 밀물과 썰물(조석)의 발생 원인을 기로 둘러싸인 지구와 달의 운동 메커니즘으로 설명했다. 모든 천체가 수레바퀴 모양의 기로 둘러싸인 채 도는데, 지구와 달의 기가 부딪쳐 요동친 결과 조석이 생긴다는 것.

흥미롭게도 당시 혜강이 읽은 서양책에는 조석의 원인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훗날 혜강은 19세기 서양의 최신 천문학 지식을 담은 ‘담천(談天)’에서 천체간의 운행원리를 규명한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을 접하고는 “모든 천체의 운행법칙이 나의 기철학과 일맥상통한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혜강은 집안이 꽤 넉넉한 덕에 당시 조선에 수입되던 서양과학의 번역서 등 희귀본을 손쉽게 구입했다. 전국의 서적상들이 앞 다퉈 그에게 책을 팔려고 몰려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책벌레’였다.

혜강은 물리 천문 의학 수학 등 서양의 다양한 과학지식을 섭렵했으며 1000여권에 달하는 책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가장 먼저 이해하고 소개했다. 또 “작살을 던져 물고기를 잡을 때 조금 아래쪽으로 던져야 한다”고 설명한 것으로 보아 빛의 굴절현상 때문에 물고기가 우리 눈에 떠 보인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서양의 지리서적도 편찬했으며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와 활발히 교류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전하는 그의 저서는 100여권에 불과하다.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신동원 교수(과학사)는 “당시 중국과 일본을 통틀어 혜강만큼 첨단 서양과학을 깊고 폭넓게 섭렵한 인물은 없었다”며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가지 이질적인 문화의 조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김훈기 동아사이언스기자 wolf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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