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행복한 세상]IT에 얽힌 사연 "전화기가 백범선생 살렸다"

  • 입력 2003년 4월 21일 16시 56분


코멘트
○가입자 5명으로 시작하다

1896년 임금이 거주하던 궁(宮)에 자석식 전용교환기가 설치되면서 행정용 전화서비스가 처음 시작됐다. 일반인 대상 전화서비스는 1902년 서울∼인천간 전화업무 서비스가 개통되면서 시작됐다. 개통 당시 최초 가입자는 5명.

○전화기, 사형수 백범 김구 살리다

백범 김 구 선생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1896년 일본 육군 중위를 살해한다.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감옥에 수감된 김구 선생은 사형집행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구한말 당시 고종황제가 전화를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사진제공 KT

사형수들에 대한 최종 재가를 하던 고종은 김구 선생 사건을 보고 “오히려 상을 줄 일이다”며 그 자리에서 사면을 결정했다. 그런데 만약 결정이 잘못 알려지거나 늦게 전달돼 사형이 집행될 것을 우려해 3일 전에 개통됐던 행정전화를 이용해 감옥 책임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면결정’을 전달했다. 전화기가 백범을 살린 것.

○전화기를 파괴하라

을사조약을 전후로 의병활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당시 일본군은 국내 통신망을 독점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의병들은 통신시설 파괴를 주요한 전략목표로 설정했다.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후 독립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독립운동가들도 전화를 이용해 사람과 자금을 모으고 거사를 논의했다. 1945년 해방 당시 국내 전화가입자는 4만5000명.

어린이들이 KT의 초고속인터넷서비스인 ADSL을 이용해 인터넷에 접속하고 있다.사진제공 KT

○전화기 5대로 집 한 채를 산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전화에는 ‘청색전화’와 ‘백색전화’ 두 가지가 있었다. ‘청색전화’는 전화국에 전화를 신청한 뒤 몇 년을 기다려야 설치가 되는 전화로 남에게 양도할 수 없었다. 반면 ‘백색전화’는 개인소유여서 마음대로 팔 수 있었다. 강남개발 바람이 불던 70년대 중반 영동전화국내 백색전화 한 대 값은 100만∼120만원. 당시 서울시내 일반주택은 500만원 안팎, 영동전화국 옆 30평 아파트 한 채 값은 1000만원 선. 신문에는 백색전화 시세표가 정기적으로 게재됐다.

○전화가입자 2000만 회선 돌파하다

전화가입자가 1962년 12만명에서 81년 326만명으로 급증했지만 여전히 회선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했다. 강남 일부지역에서는 ‘백색전화’가 200만원을 넘기도 했다.

이 같은 회선부족은 87년 ‘전국 전화 광역자동화 사업’이 완성되면서 완전히 해소됐다. 6조7000억원이 투자됐던 이 프로젝트가 완료되면서 전화 신규회선을 신청하면 당일 가설됐다. 전국 어디에서나 시내 시외전화는 물론 국제전화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전화가입자는 88년 1000만명을 돌파한 데 이어 97년 전화가입자가 2000만명을 돌파한다.

○유선전화에서 초고속인터넷을 넘어 차세대 네트워크 시대로

98년도까지만 해도 e메일을 쓰는 사람은 ‘얼리 어답터’(새로운 정보기술을 빨리 수용하는 소비자)에 속했다. 전화 모뎀을 통해 인터넷에 접속하려면 상당한 인내심을 가져야 했다.

99년 KT와 하나로통신이 비대칭디지털가입자회선(ADSL)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경쟁적으로 서비스하면서 통신 환경은 유선전화에서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로 진화한다. 올해 2월말 기준으로 초고속인터넷 서비스 가입자수는 1070만명. 유선전화 가입자 2327만명의 절반에 육박하는 수치다.

KT는 지난해 9월 세계 최초로 차세대네트워크(NGN) 핵심장비인 ‘액세스 게이트 웨이’를 대전 유성지점에 개통했다. 2007년 NGN 구축이 완료되면 새로운 디지털라이프가 열릴 것이라는 게 KT의 설명이다. 그 때는 또 얼마나 세상이 변해있을까.

공종식기자 kong@donga.com

▼전화 100년史▼

세계적으로 전화기는 지금까지 세 차례의 ‘변신’을 거쳤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1876년 처음 개발한 전화기는 자석식. A 가입자가 전화기에 붙어있는 자석발전기를 손으로 돌려서 교환원을 호출한 뒤 통화하고자 하는 B 가입자의 이름을 대면, 교환원이 B 가입자의 선로에 접속시킨 후 호출해서 A 가입자와 통화를 성사시켜주는 수동교환 방식이다.

1880년 나온 공전식은 전화국의 축전지에서 가입자에게 일괄적으로 전류를 공급하는 방식. 전화를 걸 때마다 발전기를 힘들게 돌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어졌다. 가입자가 전화기를 들면 회선에 전류가 흘러 교환대에 설치된 램프를 점등시켜 교환원을 호출한다.

교환원이 수동으로 통화를 연결시키는 불편함을 없애준 전화기는 자동식으로 1891년에 개발됐다. 아직도 주변에서 간혹 찾아볼 수 있는 다이얼식은 가입자가 회전 다이얼을 돌리면 기계식 교환기가 다이얼 회전수에 따라 상대방 통화선을 차례로 찾아나가는 방식이다. 이후 전자식 교환기가 개발되면서 전화기 다이얼이 아닌 버튼을 눌러 상대방을 호출하는 현재의 방식으로 바뀌게 됐다.

한국 최초의 전화 통화는 1896년 한성 궁내부(임금이 살던 곳)에 자석식 전화기가 설치되면서 이뤄졌다.

1902년 한성∼인천간 전화가 개설되고, 한성전화소에서 전화 업무를 개시함으로써 비로소 일반인들도 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당시 교환수는 신(新)문명을 다루는 엘리트로서 자긍심이 대단히 높은 직업에 속했다.

1908년 공전식, 1935년 자동식이 도입됐지만 당시만 해도 전화기는 총독부의 관용이거나 일부 특권층의 사치품이었다.

전화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2년 체신부가 국산 최초 전화기 ‘체신 1호’ 시리즈를 개발하면서부터. 80년대 들어 국가가 보급하던 전화기의 구입 절차가 개인이 직접 구입하는 자급제로 바뀌면서 다양하고 편리한 기능의 전화기들이 속속 등장했다.

휴대전화의 보급으로 과거의 ‘영화’를 잃은 공중전화도 한국에서 100여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처음 보급될 때에는 자석식으로 교환원을 불러 동전 떨어지는 소리를 들려준후 원하는 상대방과 통화하는 방식이었다.

옥외 무인 공중전화는 1962년 서울 산업박람회장에서 처음 선보였는데 당시 통화료는 5원. 시내 통화만 가능했던 공중전화는 78년 시내외 겸용 체제로 바뀌었고 83년 시외용 DDD 방식을 거쳐 86년 아시아경기를 계기로 카드식 공중전화가 등장했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