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e혈전증

  • 입력 2003년 1월 30일 17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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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병(病)을 고치고 또 주기도 한다. 의학의 발전으로 질병이 끊임없이 정복되고 있지만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함께 질병은 지치지도 않고 태어난다. 역병 때문에 그리스와 로마제국이 망했고 페스트 탓에 중세유럽이 끝장났다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찬란한 르네상스 문명은 매독이라는 악의 꽃도 선사했다. 인간해방의 시대정신 속에서 성폭력과 매춘이 쌍둥이 사촌처럼 자라났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은 뜻밖에도 결핵을 모셔왔다. 인구의 도시집중, 열악한 작업환경과 슬럼가, 오랜 노동과 오염된 공기 탓이다. 산업화로 삶은 놀랄 만큼 편해졌지만 이번엔 암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됐다.

▷인류가 동굴을 버리고 문명의 세계로 나온 이래 짐승에 잡아먹힐 확률은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기계에 다칠 확률은 동굴시대 짐승에 당할 확률보다 훨씬 높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이륜차를 포함, 차 1만대당 교통사고 사망자수는 5.5명이나 된다. 미국에서는 1.9명이라는데, 겉보기엔 훨씬 튼튼하게 생긴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탔을 때의 사망률이 되레 보통 차보다 3배나 더 높다. 조그만 휴대전화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1993년 미국의 한 부인네가 온종일 휴대전화질만 하다 뇌종양으로 숨졌다고 그 남편이 전화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낸 이후 휴대전화가 암을 유발한다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현대 테크놀로지의 총아인 컴퓨터 역시 안전할 리 없다. 컴퓨터를 오래 쓰면 눈이 침침해지고 목과 어깨에 이상이 오는 VDT증후군에 시달린다는 건 이제 구문이다. 채팅 중독, 사이버섹스 중독에 빠지는가 하면 인터넷을 통한 원조교제와 불륜 때문에 가정파탄에 이르는 수도 있으니 컴퓨터엔 반사회적 바이러스가 내장된 모양이다. 최근엔 영국 BBC방송이 장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장딴지가 부어 목숨까지 잃을지 모르는 e혈전증(e-thrombosis)에 걸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e혈전증 사례를 보고한 뉴질랜드 의학팀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다. 한시간에 5분 정도는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훨씬 나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건강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말처럼 쉽고도 무책임한 건강지침도 없다. 99년 일본에서 운전 중 휴대전화 금지규칙을 발표한 뒤 휴대전화와 연관된 교통사고가 75%나 격감한 걸 보면, ‘컴퓨터 1시간 사용에 5분 휴식’이라는 법규라도 나와야 할 판이다. 미래의 사가(史家)들은 컴퓨터로 인한 ‘전자병’이 어떤 문명을 멸망시키고 어떤 문명을 낳았다고 기록할까.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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