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본 세상]가상 臟器-환자로 대신

  • 입력 2002년 12월 17일 18시 08분


보통 사람은 컴퓨터를 그저 인터넷이나 문서작성 또는 채팅 도구로 쓰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컴퓨터의 놀라운 성능을 유감 없이 보여 주는 것은 모의실험, 즉 시뮬레이션이다. 요즘 과학자들은 비행기에서 타이어까지 거의 모든 제품을 컴퓨터로 디자인하고 모의실험을 한다. 실제 제품과 똑같은 수학적 모델을 만들어 열이나 충격에 강한지 실험한다. 이렇게 하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고 비행기나 자동차를 부수지 않아도 된다. 요즘 강대국은 핵실험도 슈퍼컴퓨터로 한다.

컴퓨터 모의실험의 도입이 가장 늦은 분야는 생물학과 의학이다. 생명현상은 워낙 복잡하고 변수가 많아 수학적으로 모델링하기 어렵다. 하지만 요즘 ‘인 실리코(in silico) 생물학’이 등장하면서 이것도 옛 이야기가 되고 있다. 시험관(in vitro)이나 생체(in vivo)실험에 의존해온 생물학자들이 컴퓨터로 ‘가상 세포’ ‘가상 장기’ ‘가상 환자’를 만들어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최근 미국의 한 건강자문회사가 선보인 ‘아르키메데스’란 이름의 가상 환자가 대표적 사례이다. 이 프로그램은 당뇨병 심장병 천식환자에 대한 지식을 총망라해 만들었다. 만일 당신이 당뇨병 환자라고 치자. 식사 전에 “점심 메뉴로 돼지고기 바비큐, 구운 감자와 초콜릿을 먹겠다”고 입력한다. 그러면 컴퓨터는 “이렇게 식사를 하고 혈당을 정상 수준으로 유지하려면 1시간반 동안 운동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당뇨의 부작용으로 2년 뒤 망막이 손상돼 실명할 확률은 26%이다”고 답한다.

이 모의실험 프로그램은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된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컴퓨터가 더 작아지면 개인휴대단말기(PDA)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식단을 선택할 수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데니스 노블은 ‘가상 심장’을 개발했다. 가상 세포 덩어리로 이루어진 이 모델은 가상의 산소와 당을 소모하며 실제로 심장처럼 뛴다. 이 심장에 약을 투여해 어떤 약이 심장병에 효과가 있는지, 부작용은 없는지 확인한다.

제약회사 호프먼 라로슈는 고혈압 치료제 미베프라딜에 대해 미국식품의약국이 1000명의 임상실험을 요구하자, 100명에게만 임상실험을 하고 나머지는 ‘가상 심장’을 통해 안전성을 입증해 시판 허가를 받았다. 최근 국내에서도 과학기술원 이상엽 교수가 초보적인 ‘가상 세포’인 ‘메타 플럭스넷’을 개발했다.

생명과학과 정보기술의 결합은 ‘피지옴’이란 새 학문을 만들어내고 있다. 정보기술(IT)을 총동원해 생명현상을 시뮬레이션하자는 것이 피지옴이다. ‘게놈’ 이후는 ‘피지옴’ 시대가 될 것이란 말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신동호동아사이언스기자 do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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