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SF영화에 담긴 인간의 존재 '기술과 운명'

  • 입력 2001년 11월 2일 18시 29분


◇ 기술과 운명-사이버펑크에서 철학으로/이정우 지음/212쪽 1만원 한길사

영화가 “환영(幻影) 조성의 명수”(예술사학자 아놀드 하우저)라면 영화 중에서도 SF영화가 제일일 것이다. 테크놀러지가 만든 화려한 환상 속에 인간 존재의 미래상이 투사되기 때문이다.

재야철학자 이정우씨(42·철학아카데미원장)가 SF영화의 ‘미학적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비디오 앞에 앉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기반으로 동서양 사상을 넘나들던 그가 대중문화에까지 촉수를 뻗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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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많은 SF영화 중에서 ‘블레이드 러너’ ‘공각기동대’ ‘바이센테니얼 맨’ ‘매트릭스’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 5편의 ‘사이버 펑크’ 영화를 골랐다. 모두 로봇 사이보그 복제인간 같은 인간의 대리물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을 탐구한 작품이다.

“영상과 사유의 행복한 만남”을 시도한 중년의 철학자는 “진정한” “최고의” 같은 감탄사도 주저하지 않으며 영화의 발밑에 기꺼이 머리를 조아린다. 철학으로 영화를 훈계하려드는 ‘영화로 철학하기’류의 책들과는 자세부터 다르다.

행여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꼼꼼히 화면을 돌리면서 사근사근 스토리를 풀이하는 것은 이런 경외심의 발로일까. 중요한 장면이 나올 때면 어김없이 ‘스톱’ 버튼을 누르고 감독도 생각지도 못했던 의미들을 캐낸다. ‘기억’ ‘기술’ ‘시간’ ‘죽음’에서부터 ‘자아’ ‘타자’ ‘모방’ ‘외화(外化)’ ‘탈물질성’까지 아우르면 영화는 한편의 철학서가 된다.

조물주인 인간에 대항하는 레플리컨트(인조인간)를 처치하는 최초의 사이버 펑크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저자에게는 각별한 듯싶다. 이씨는 이 영화가 “시청각적 마약과도 같은 걸작”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후에 등장한 유사한 영화 대부분이 이 영화가 그려놓은 사상적-미학적 구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시한부로 디자인된 레플리컨트가 조물주를 죽임으로써 죽음을 받아들이는 디스토피아에서도 그는 능히 생의 본질을 건져올린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진 본질이 아니라 만들어나가야 할 미래”(36쪽)라고. 레플리컨트 여성과 이를 ‘사냥’해야하는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결말에서는 “우리는 사랑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는 잠언을 뽑아낸다.

이밖에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걸작이라는 ‘공각기동대’에서 기계의 진화론을 추종하는 기술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한다거나, 기독교적 메시아주의가 깔린 ‘매트릭스’를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를 깨닫고 ‘나’를 찾는 ‘구도(求道) 영화’로 파악하는 것에서 철학자다운 깊은 혜안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영화의 모든 의미는 낱낱이 설명되지 않는다. “‘나’란 무수히 접속된 네트(net)들 사이에서 흘러가고 흘러오는 정보들의 한 교차로가 아닐까”(89쪽·‘공각기동대’)라거나, “어쩌면 우리 마음 자체가 하나의 가상세계인 메트릭스가 아닌가?”(182쪽·‘매트릭스’)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독자를 사유의 여백으로 유인한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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