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 이론 의학·경제분야로 지평 넓힌다

  • 입력 2000년 9월 27일 18시 59분


카오스 이론으로 대표되는 복잡성의 과학이 최근 의학과 경제 분야에 활발히 적용되고 있다.

최근 포항공대 물리학과 김승환 교수와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홍승봉 교수는 간질환자의 뇌파를 측정, 간질발작이 일어나기 20분 전에 뇌파에 특이한 변화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카오스 분석을 통해 밝혀냈다. 연구자들은 또 머리에 붙인 128개의 탐침에서 얻은 신호를 해석해 뇌에서 간질이 일어나는 부위를 찾는데도 성공했다.

간질은 뇌조직이 손상됐거나 제대로 자라지 않은 경우 나타난다. 홍 교수는 “뇌의 복잡한 회로는 수많은 전기신호의 흐름으로 유지된다”며 “일시적인 과도 방전으로 전기신호가 교란되면 의지가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간질 같은 증세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과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뇌파를 연구해 왔다. 하지만 눈으로 뇌파의 파형을 읽는 정도의 분석으로는 발작의 전조를 찾기 어렵다. 김 교수는“무질서해 보이는 뇌파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패턴의 변화를 집어낼 수 있는 새로운 분석도구가 필요하다”며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는 카오스 이론이 이 일을 해낸다”고 말했다.

간질발작을 몇 십분 전에 예측할 수 있게 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홍 교수는 “이런 증상의 진행을 억제하는 약은 이미 개발돼 있다”며 “간질환자의 두개골에 보청기 만한 뇌파측정기를 심고 허리춤에 무선수신기를 달고 다니다 신호가 울리면 얼른 알약을 먹으면 된다”고 설명했다. 홍 교수는 이런 전자 장비들도 몇 년 안에 실용화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인제대 물리학과 이상운 교수와 가톨릭대 의대 정대영 교수는 태아의 심박변이를 카오스 분석방법으로 해석해 태아가 건강한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게 했다. 이 연구팀이 개발한 심박측정시스템은 벤처기업 네우드에 의해 빠르면 올해 안에 휴대용 심박측정기로 상품화될 것으로 보인다.

네우드의 권기철 부사장은 “산모들이 데이터 파일을 인터넷으로 원격진료센터로 보내면 카오스 분석을 통해 이상 여부를 확인해 담당의사에게 알려주게 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본격적인 원격진단 시대가 열리는 셈이다.

김승환 교수는 “이미 선진국에서는 카오스 패턴을 보이는 생체신호를 감지해 심장마비, 뇌졸중 등을 예방할 수 있는 각종 의료장비를 만드는 연구가 활발하다”며 “이 분야의 전 세계 시장 규모는 이미 연간 7억달러 수준이며 매년 40%이상의 성장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복잡성 과학이 이처럼 활발히 실생활에 응용되는 것은 컴퓨터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됐기 때문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물리학자들이 복잡계 현상을 수식화하기 위해 뛰어들었지만 엄청난 계산량 때문에 대부분 중도에서 포기했다.

김 교수는 “복잡계 현상은 예외적인 게 아니라 우리 주변 어디서나 벌어진다”며 “난류 등 물리현상 뿐만 아니라 뇌파나 심장박동 등 생체신호나 주가, 환율 등 금융시장의 각종 지표에서도 복잡계 현상이 관찰된다”고 말했다. 오히려 물리학 교과서에 나오는 ‘우아한’ 몇 개의 식으로 표현되는 운동들이 예외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20세기 미국의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교수는 “난류현상은 고전 물리학이 풀지 못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복잡계 현상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가 죽은 지 십 수년이 지난 오늘, 컴퓨터란 무기를 갖게된 복잡성 과학은 물리학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새로운 과학의 조류로 전진을 거듭하고 있다.

<강석기동아사이언스기자>alchimist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