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앞둔 대기업 '도청공포증'…전화―E메일 사용자제

  • 입력 2000년 3월 28일 19시 40분


A그룹 구조조정본부 P부장은 최근 담당 임원에게 총선관련 사항을 전화상으로 보고하려다가 혼이 났다. 담당 임원은 “그런 사항을 전화로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찾아와서 보고하라고 언성을 높였다. 그 이후 P부장은 웬만한 사항은 직접 만나서만 보고한다.

대기업들이 도청 공포증에 시달리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총선을 앞둔 요즘에는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과거보다 규모가 줄어들었을지는 몰라도 대기업이 여전히 각종 정치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정치권의 자금줄이 되고 있다는 것은 재계의 공공연한 비밀. 선거철처럼 민감한 시기에 정치자금 얘기가 외부로 흘러나가면 해당 기업에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있다.

B그룹 관계자는 “직원들 대부분은 전화가 100% 도청된다고 믿는다”며 “그래서 요즘 같은 선거철에는 더욱 조심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도청이 기술적으로 가능한지에 관계없이 그저 불안하기 때문에 중요한 얘기는 직접 만나서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전문용역회사에 의뢰하여 도청검사를 강화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기업에서는 E메일도 믿지 않는다. E메일은 해킹을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 기업에서는 일반적인 공지사항용으로만 쓰고 있다. C그룹은 E메일로 일정 용량 이상의 정보가 전송되면 즉시 상급자에게도 자동으로 전송토록 해 놓았다.

D그룹 관계자는 “사내통신망이 완벽하게 구비돼 있지만 간부들간의 직접적 접촉은 여전히 중요한 정보유통수단”이라며 “휴대전화의 경우 도청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휴대전화조차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밝혔다.

정보통신 발달로 전자결재가 가능한 시대가 됐지만 중요한 정보의 유통은 여전히 ‘원시적인 형태’(입과 귀의 직접적 만남)로 이뤄지고 있는 것.

재계 내부에서 자주 이야기되는 일화 하나. 모 그룹 재무팀은 지난해 정보유출로 홍역을 치러야 했다. 외자유치협상중에 이같은 사실이 일부 언론에 보도되면서 유치협상이 결렬된 것. 일단 그룹 기자실의 모든 전화통화기록이 조사됐다. 다행히 기자실에서 재무팀으로 전화한 사실이 나타나지 않아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그룹 관계자는 “누군가 사내에서 전화로 정보를 알려줬다면 금방 찾아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그룹에서는 주요 정보가 경쟁 그룹으로 새 나가는 일이 자주 발생하자 웬만한 논의는 담당자끼리 직접 만나서 하도록 권장하기도 한다.

<임규진기자>mhjh22@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