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화의 미술시간]〈20〉나라를 지킨 민중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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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년.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년.
아픈 역사가 없는 나라가 있을까. 한때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리며 대제국을 건설했던 스페인도 프랑스 점령하에서 고통받던 시절이 있었다.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던 고야는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아팠던 장면 중 하나인 1808년 5월 3일의 사건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788년 즉위한 카를로스 4세는 무능하고 우매한 데다 정사에는 관심도 없었다. 사냥에 몰두하느라 정치는 왕비와 그녀의 정부였던 재상 고도이에게 맡겨버릴 정도로 책임감마저 없었다. 왕비와 고도이 역시 무능하긴 마찬가지였다. 나라가 무탈할 수 없었다.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1808년 자신의 형인 조제프를 스페인의 왕으로 앉혔다. 그해 5월 2일, 나라의 주권을 잃은 스페인 민중들은 마드리드에서 봉기를 일으켜 나폴레옹 군대에 대항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은 이튿날 새벽, 반란에 가담한 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고야는 공개 처형이 집행된 바로 그날을 주제로 이 그림을 그렸다. 화면 왼쪽에는 피범벅이 된 시체들 뒤로 자신의 처형 순서를 기다리며 겁에 질린 사람들이 보이고, 오른쪽엔 프랑스 군인들이 일렬로 서서 이들을 향해 기계적으로 총을 쏘고 있다. 보통 역사화에는 전쟁 영웅이 등장하지만 이 그림에 영웅 따윈 없다. 희생자들만을 강조해 전쟁과 폭력의 잔혹함을 고발하고 있다. 다만 하얀 티셔츠를 입은 남자의 존재감이 큰데, 옷차림과 검게 그을린 피부로 봐서 그는 평범한 노동자다.

그런데 이 남자가 두 손을 위로 뻗은 모습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과 흡사하다. 그림을 가까이서 보면 그의 오른 손바닥에 못자국 같은 성흔도 있다. 고야는 스페인 민중들을 폭도가 아닌 조국을 위해 죽은 순국자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예수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어느 나라 역사나 마찬가지이듯, 결국 나라를 지키는 건 왕이나 위정자가 아닌 민중들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프란시스코 고야#1808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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