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기의 음악상담실]흐르는 청춘에 띄우는 편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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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정태춘 ‘섬진강 박시인’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의학과전문의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의학과전문의
봄노래를 한 곡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화창한 봄날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 서글프게 투덜거리고 울적하게 웃기는 삐딱한 봄노래죠. 아마 ‘섬진강 박시인’이란 노래를 모르시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정태춘 박은옥 부부가 2012년에 발표한 앨범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에 실린 곡이죠. 한 번 들어보세요. 좋은 노랩니다.

이 앨범에 실린 곡들은 10년 동안의 긴 침묵 끝에, 날 선 분노와 저항의 직설을 내려놓고, 혹은 유보하고, 정태춘 씨 노래들의 시발점으로 회귀한 곡들입니다. 고독과, 그 고독에서 벗어나고 더 나아가 의미를 찾기 위한 방황들, 힘들게 찾아 지키고 싶었던 대상과 가치를 상실한 후의 슬픔과 극복의 과정들을 들려주죠.

정 씨의 1980년대 노래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앨범의 곡들은 성숙해지려고 노력하는 어설픈 어른들의 노래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같지 않은 세상에 한마디 확 질러 버리고 싶은 욕구를 억제하고, 그렇게 꾹 눌러 담아 놓기엔 너무 힘든 억울함과 후회를 스스로를 희화하는 구수한 농담으로 치환하고, 비슷한 심정들이 자기 이야기인 양 따라 읊조릴 수 있도록 승화시킨 노래들인 것이죠. 치열했던 현실 비판과 자기반성의 자리에, 아직은 좀 수줍은 수긍과 이해와 유머와 승화와 공감을 대신 넣은 것입니다. 여기서 ‘박시인’은 박남준 시인이라는데, 시인의 시들도 정 씨의 노랫말과 매우 비슷한 색깔이죠.

노래는, 아직도 마음은 청춘이고 그리움도 여전히 짙고 깊은데, 몸은 마음과 달라서 봄바람에도 다리가 시린 ‘지천명’의 한 사내를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는 등장하자마자 “봄은 왜 오고 ××이야, 꽃비는 또 왜 내리고? 두고 봐라! 십리 벚길 좋다고 환장해도, 떠날 것들은 다 떠나더라”라고, 젊은 놈들 봄이 왔다고 좋아해 봤자, 다 헛것이라고 신소리를 하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는 떠난 것들을 아직도 그리워합니다. 위의 신소리는 훈계와 비관으로 가장한 후회와 그리움이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과 기회와 사람들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쓰고 지우고 또 쓰기를 되풀이하죠. 이런 ‘심경의 언어화’는 자신의 모습을 잘 파악하고 예전보다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더 잘 이해하려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행위입니다. 뛰어내릴 여울 하나 없는 봄날의 섬진강으로 뛰어들지 않고 한 번 잘 살아 보자고 애쓰는 것이죠.

너그러움, 관용은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한 필수 덕목입니다. 받아들임, 수용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상대방을 내 마음에 들게 변화시키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상대방과 상황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수긍은, 관용과 수용의 과정을 거쳐야 가능하죠.

‘섬진강 박시인’을 들으면 따뜻하고 부드러울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아버지가 어린 손녀를 안고 어색하지만 진심으로 웃는 일그러진 미소, 진심을 내보인 것이 창피해서 괜히 아기를 울리는 모습 같은 이미지들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정 씨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한국어가 지닌 음과 리듬, 그리고 노래에 그 특성들을 적용시키는 방법들을 가장 잘 가르쳐준 저의 소중한 음악 선생님 중 한 분이니까요.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섬진강 박시인#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심경의 언어화#관용#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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