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칼럼]분노를 國政의 불쏘시개로 삼지 말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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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로 판명된 직접민주政… 文정부 집착 걱정스러워
국정을 촛불로 운영할 건가
朴에 대한 민심, 親盧 MB정서… ‘분노의 정치’ 키워선 곤란
정부 출범 반년 사그라든 촛불… 잔치 끝나면 계산서 날아올 것

박제균 논설실장
박제균 논설실장
직접민주주의와 관련해 흔히들 하는 착각 또는 오해가 있다. ‘대중이 직접 정치적 의사결정을 하는 직접민주주의가 최고의 정치체제다. 하지만 국가의 규모가 커지면서 모든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국민을 대표하는 대의(代議) 기관이 민의(民意)를 반영하는 간접민주주의, 즉 대의민주주의가 나온 것이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전제부터 잘못됐다. 민주주의의 이상향처럼 여겨지곤 했던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시절부터 직접민주주의는 실패한 정치체제임이 판명된다.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포퓰리즘을 불렀고 결국 중우(衆愚) 정치로 타락했다. 그리스의 맹주였던 아테네가 지중해 패권을 로마에 뺏기고 몰락한 주원인이 직접민주주의 때문이었다는 것이 사가(史家)들의 평가다. 로마가 그리스 전성기에 원로원 의원 3명의 ‘신사유람단’을 보내고도 결코 따라 배우지 않은 것이 직접민주주의였다.

플라톤이 저서 ‘국가’에서 철인왕을 우두머리로 하는 수호자 집단이 다스리는 과두정(寡頭政)을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제시한 것도 직접민주주의 폐해를 봤기 때문이다. 뒤에는 저서 ‘법률’에서 한 사람과 소수와 다수의 권력이 균형을 이루는 혼합정체(政體)가 이상적이라고 했다. 그리스 로마사에 정통한 미국의 칼 J 리처드 교수에 따르면 플라톤의 혼합정체론은 미국의 정치체제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은 신생 미국에 이상적인 정치체제가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이들은 헌법제정회의에서 플라톤의 혼합정체론을 다듬은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론하며 한 사람(대통령)과 소수의 대표자(상원), 그리고 다수의 대표자(하원)가 권력의 균형을 이루는 혼합정체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강한 집착이 걱정스럽다. 문 대통령부터 새 정부 출범 100일을 맞아 직접민주주의가 정부의 주요 국정운영 기조가 될 것임을 예고했다. 문 대통령은 정권인수위원회 격인 국민인수위원회의 대국민 보고회에서 ‘국민은 간접민주주의를 한 결과 우리 정치가 낙오되고 낙후됐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을 차용해 직접민주주의에 애착을 드러낸 대통령은 그 대표적 사례로 촛불집회를 들었다.

촛불에 힘입어 집권한 대통령의 인식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국정을 언제까지나 촛불식으로 운영할 순 없다.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은 12일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세월호 사고 당일 대통령에게 보고한 시간은 물론이고 법령까지도 조작했다고 발표했다. 많은 국민이 그날 박 전 대통령의 행적에 개탄하거나 분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박 전 대통령의 구속 연장 여부 결정이 임박한 상황에서 오해 소지가 충분한 발표였다. 여권 관계자는 “자료가 전날 발견돼 당일 아침 회의에 보고됐다. 사심 없이 있는 그대로를 국민께 알리라는 것이 대통령의 뜻이었다”며 정치적 계산이 일절 없었음을 강조했다. 그렇다고 해도 ‘국정의 사실상 2인자’로 불리는 대통령비서실장이 큰일이라도 난 듯 마이크를 잡을 일은 아니었다.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분노의 정치’를 키워서는 곤란하다. 여권 내에서 원세훈 국정원이 선거 민심을 조작하려 한 데 대해 이명박(MB) 전 대통령이 사과라도 해야 넘어갈 수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MB가 사과할 리 없는 데다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있는 터에 전전(前前) 대통령까지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을 봐야 하는가. 한국 정치의 황폐화를 부추길 뿐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MB에게 분노한다고 그들의 분노를 국정의 불쏘시개로 삼아선 안 된다.

물론 직접민주주의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지금 청와대 홈페이지에선 방위사업청의 결정을 재고하라는 국민청원이 진행 중이다. 작년 7월 차세대 군단급 정찰용 무인기 1대가 시험비행 도중 추락했다. 방위사업청은 이 무인기를 개발한 국방과학연구소(ADD) 비행제어팀 연구원 5명에게 무인기 가격 67억 원을 배상하라고 통보했다. 연구원들의 과실이 있다고 해도 무인기를 팔아 금전적 이득을 취한 것도 아닌데, 1인당 13억 원씩 물어내라고 한 것은 가혹하다. 이런 국민청원이야말로 간접민주주의의 허점을 보완하는 직접민주주의의 미덕이다.

문제는 권력이 필요에 따라서 직접민주주의를 손 안 대고 코 푸는 정치적 수단으로 차용하는 것이다. ‘촛불 잔치’는 끝났고, 문재인 정부도 반년이 다 됐다. 잔치가 끝나면 계산서가 날아온다. 그 계산서는 박근혜 정권에 분노한 민심이 새 정부 출범에 환호하며 ‘처갓집 말뚝’까지 예뻐 보이던 허니문 때와는 분명 다를 것이다.
 
박제균 논설실장 phark@donga.com
#문재인 정부의 직접민주주의 집착#분노의 정치#방위사업청#국민청원#촛불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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