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뉴스의 강철 코어가 무너지고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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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영-이경재 향우회 사진 속 몇몇은 여름 반팔 와이셔츠
최순실 측 위증교사와 관련 없어
탄핵 정국에 쏟아진 오보와 억지… 신문 지면 가득 채울 정도
신뢰할 만한 뉴스의 상실은 민주주의를 위협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의 앨릭스 존스는 ‘뉴스의 상실(Losing the News)’이란 책에서 정보의 ‘강철 코어(iron core)’가 사라지면서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했다. 저자는 현재 미국 하버드대 언론 관련 연구소인 쇼렌스타인센터 소장으로 있다. 정보의 강철 코어는 팩트에 기반을 둔 뉴스를 말한다. 이런 뉴스에 근거해 신문의 논평이 이뤄지고, 시사 프로그램과 인터넷 커뮤니티의 담론이 펼쳐지며, 식사 자리에서 대화가 오간다.

 나로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정보의 강철 코어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는 기분이다. 국회 최순실 국정 농단 국정조사장에서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과 최 씨 변호인인 이경재 변호사가 향우회에서 만나는 사진을 공개했다. 이 사진이 위증교사 의혹의 증거로 거의 모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디지털 사진 시대에 촬영 시점이 없는 사진에 의심을 갖는 데 기자의 감각까지 필요하지도 않다. 신문에 난 사진을 자세히 보니 몇몇 참석자는 여름 반팔 와이셔츠를 입고 있다. 사진은 최 씨 사건이 터지기도 훨씬 전에 찍혔다.

 이런 사진을 믿고, 아니 믿는 척하고 일부 신문에서는 심각한 논평을 냈고 시사 프로그램의 패널들은 흥분해 떠들었다. 네이버와 다음은 이런 뉴스일수록 더 많이 더 오래 포털에 띄운다. 이렇게 잘못된 여론이 형성된다. 그런 여론에 비위를 맞추려고 인명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이 의원이 국정조사 위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최 씨 아들은 청와대에서 근무한 적이 없다. 아니 아들 자체가 없다. ‘길라임’이라는 가명은 박 대통령이 아니라 차움병원의 한 직원이 임의로 만든 것이다. ‘통일 대박’은 최 씨가 만든 말이 아니라 신창민 교수의 책 ‘통일은 대박이다’에서 나왔다. 최 씨의 언니 순득 씨는 박 대통령의 성심여고 동창이 아니다. 포털은 찌라시를 닮아가고 언론은 그런 포털을 닮아가고 있다. 명백한 오보들만으로도 신문 지면 하나를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다.

 나는 현장을 취재할 수 없어서 국정조사 청문회만은 빼놓지 않고 보려고 노력했다. 최근 언론 보도 중 믿을 수 없는 게 너무 많아 직접 당사자들의 말을 듣고 싶었다. 당사자들이 거짓말도 하겠지만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표현이나 표정에서 뭔가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청문회를 다룬 뉴스의 내용이 내가 청문회를 보면서 느낀 것과는 너무 다르다는 점이다.

 기자는 취재할 때 가설을 세운다. 그러나 기사는 가설이 아니라 사실을 써야 한다. 정윤회 문건을 작성한 박관천 전 경정은 비선 실세를 느꼈다. 그 문건이 폭로됐을 때 비선 실세에 주의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왜 최순실이 아니라 정윤회를 중심에 놓고 문건을 만들었을까. 사실이 아니라 가설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정윤회가 최순실에 이은 권력서열 2위인지도 의문이다. 그는 최순실 게이트에서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언젠가 정윤회가 등장할 것이라고? 그래 기다려 보자. 그러나 첩보 보고가 아니라 기사라면 그때나 가서 써야 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도청 현장팀에서 중간 관리자를 거쳐 백악관 참모와 대통령에게로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구조였다. 그러나 최 씨의 국정 농단은 박 대통령과 최 씨의 직접적이고 비밀스러운 관계로 출발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처럼 공식 라인에서 중간 단계의 조력자가 꼭 필요한 구조가 아니다. 그런데도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최 씨와 잘 알았을 것이라는 가설에 매달린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일부는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고, 일부는 우 전 수석 처가와 넥슨의 부동산 거래를 다룬 의혹 기사 이후 이를 어떻게든 합리화해 보려는 바이어스(bias)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을 밝혀내고 박 대통령의 탄핵소추를 이끈 것은 언론의 개가(凱歌)다. 그러나 대통령 관련 보도에 대한 견제가 한번 무너지자 언론은 가장 신중하지 못한 태도로 돌변해 이 나라를 ‘아니면 말고’ 뉴스 공화국으로 만들어버렸다. 탄핵 정국에서만의 일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계속된다면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뉴스의 상실#박근혜#최순실#워터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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