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사물 이야기]가위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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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대선이 한창이다. 8년 전 이맘때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 머물고 있었다. 4개월 동안 살게 된 숙소에 도착해 보니 ‘가구’라는 것은 일절 없었고 화장실에도 두루마리 휴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학교 관계자와 당장 필요한 이불 매트리스 책상 의자를 사러 이케아로 달려갔다. 하룻밤 다른 집에서 신세를 지고 다음 날부터는 빈 냉장고를 채우고 배달된 가구들을 조립하느라 며칠을 보냈다. 그동안 나는 여러 번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다. 비록 조립 상태가 좋지 않아 흔들흔들하기는 하지만 책상도 의자도 있고 노트북도 있고 주방에는 다행히 부엌칼도 하나 있는데 무엇이 부족한 거지? 라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생필품들을 대충 갖춘 어느 날 학교에서 나와 섀턱 애비뉴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맛집과 크고 작은 상점이 많은 거리였다.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간판도 눈에 안 띄는 작은 문구점이 보였다. 수입 문구용품들이 전시돼 있고 종이를 고르면 수제로 명함을 만들어주는 곳.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무광의 은빛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부드러운 곡선의 가위였다. 엄지와 중지에 그 가위를 끼우고는 살짝 자르는 시늉을 해보았다. 가벼운 데다 손에 착 감기는 느낌과 결코 무뎌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 예민한 칼날. 본체를 코팅 처리해서 테이프를 잘라도 날에 달라붙지 않을 것 같았다. 그 가위의 값은 12달러.

  ‘궁극의 문구’를 쓴 작가의 말에 따르면 가위를 살 때는 “신발 고르듯” 자신에게 잘 맞는 제품을 선택해야 한다고 한다. 칼날 끝이 휘지 않으면서 서로 잘 맞고 가위질을 해봤을 때 가볍게 되는 것으로. 

 저녁이 되자 거리는 버락 오바마의 얼굴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대선을 한 달 앞두고 있던 때라 버클리 어딜 가나 오바마를 지지하는 포스터와 삼각 깃발들로 화려해 보였다. 흥겨운 재즈 연주 소리가 들려왔고 손에 피자 박스를 든 사람들이 인도에 선 채로 먹고 있었다. 나도 ‘치즈 보드’에 들어가 ‘오늘의 피자’ 반 판과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저녁거리도 생겼고 며칠 동안 없어서 불편하기 짝이 없었던, ‘두 개의 쇠를 교차시켜서 가운데 사북을 박고 지레의 원리를 이용하여 자르는 도구’도 하나 샀으니 든든하기까지 했다.

 지난 일요일에 초등학생 조카 둘과 시간을 보내다가 슈퍼마리오 등 작게 그린 게임 캐릭터들을 책갈피로 만들겠다고 하기에 가위를 들고 내가 오려줬다. 조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큰이모는 어떻게 그렇게 가위질을 잘해?”라고 물었다. 내 자매들이 그 애들만 할 때 수없이 사들였던 종이 인형들을 몇 년 동안 정교하게 오려주다 생긴 솜씨라는 것을 조카들은 알 리 없겠지. 있을 때는 몰라도 막상 없어 보면 불편한 것. 가위 말고도 그런 사물들은 또 있을 것이다.
 
조경란 소설가
#가위#문구#문구용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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