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어름사니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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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얼쑤∼ 잘한다!” 2, 3m 높이의 외줄에 올라선 어름사니가 춤추듯 걸어서 줄 위를 오간다. 앉아서 가랑이로 줄을 타는가 싶더니 허공을 박차고 올라 한 바퀴 돈 뒤 사뿐히 내려앉는다. 놀이판은 관객들의 환호성으로 뒤덮인다. 남사당놀이의 한 장면이다.

 남사당은 조선 팔도 장터와 마을을 떠돌며 소리와 춤을 팔던 유랑 예인집단. 남사당패의 우두머리는 꼭두쇠라 한다. 남사당패 하면 떠오르는 바우덕이는 안성남사당을 이끌었던 꼭두쇠 여인의 별명이다. 여자가 꼭두쇠가 된 것은 예전에 없던 일로 그만큼 재주가 출중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안성의 대표 축제 이름이 바우덕이축제다. 이들이 보여주는 재주는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보기, 덜미 등이다.

 하지만 전통 예능의 이름은 점차 우리 곁에서 멀어져 간다. 얼마 전 TV 퀴즈 프로에서 어름을 묻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 어름은 줄타기 재주로, 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스럽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름을 타는 이가 줄타기 고수, 즉 ‘어름사니’다.

 남사당놀이의 첫째 놀이인 풍물은 꽹과리 태평소 소고 북 장구 징 따위로 흥을 돋우는 것이다. ‘버나’는 사발이나 대접을 막대기 따위로 돌리는 묘기이고, ‘살판’은 몸을 날려 넘는 땅재주를 말한다. ‘덧보기’는 탈놀음, ‘덜미’는 꼭두각시놀음이다.

 남사당놀이에서 각 종목의 우두머리를 뜬쇠라고 하는데 버나쇠, 살판쇠 하는 식으로 부른다. 뜬쇠 밑의 초보가 ‘삐리’다. 판소리에서도 소리보다 아니리에 치중하는 어설픈 광대를 ‘아니리광대’라 한다. 아니리는 창을 하는 중간 중간에 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듯 엮어 나가는 사설(辭說)을 말한다. 요즘 말로는 노래가 아니라 랩이라고나 할까. 허나 누구보다 서글픈 광대는 저승패다. 늙어서 놀이를 제대로 못하고 저승에 갈 날이 가깝다는 뜻이다.

 신명 나는 전통 공연을 볼 때마다 우리 사전의 속 좁음을 보여주는 낱말 하나가 떠오른다. ‘아주 흥겹거나 매우 푸지다’는 뜻으로 쓰는 ‘걸판지다’라는 말이다. 사전은 이 낱말을 ‘거방지다의 잘못’이라고 고집부린다. 음식을 거방지게 차렸다? 거방진 공연? 언중은 이런 말을 거의 쓰지 않는데도 이 말이 표준어다. 더는 고집부리지 말고 거방지다의 뜻풀이 중 ‘매우 푸지다’는 걸판지다에 넘겨주는 게 좋겠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남사당#어름사니#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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