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하 전문기자의 그림엽서]돌아오라! 노면전차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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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1월 29일 전찻길 철거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전차 381호. 서울역사박물관 앞 신문로에 ‘전차와 지각생’이란 설치물로 전시 중이다.
1968년 11월 29일 전찻길 철거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전차 381호. 서울역사박물관 앞 신문로에 ‘전차와 지각생’이란 설치물로 전시 중이다.
영화 ‘암살’이 내 유년의 기억을 일깨웠다. 그렇다고 그리 오랜 것도 아니다. 1958년생 개띠에겐 그래봐야 50여 년, 그러니까 북한 무장공비가 침투한 1·21사태에 이어 향토예비군이 창설(1968년)되고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란 노래(1969년)가 유행하던 1960년대 후반이다. ‘암살’에서 나의 열 살 꼬마 때 기억을 되살린 건, 느릿하게 달리는 노면전차였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일제의 군인과 앞잡이, 밀정 처단에 동분서주하던 1933년 경성(서울)에서 전차는 가장 인상적인 오브제였다.

그게 모두 사라진 건 1968년 11월 29일. 아폴로11호의 달 착륙 여덟달 전이다. 당시 서울은 500만 시민에 자동차 5만 대. 한 학급에 102명의 ‘콩나물교실’에 숨조차 쉬기 힘든 ‘콩나물버스’가 일상이던 국민소득 193달러 빈국(貧國)의 수도였다. 곤궁과 결핍 속에서 이어간 서민의 삶. 그게 얼마나 팍팍했을까 짐작이나 할 수 있을지. 그래서 당시 기억은 더 빨리 잊혀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시절이 전차로 인해 불쑥 되살아났다. 뭔가 짠하면서도 푸근한 기억과 더불어.

그랬다. 빛바랜 기억 속에 전차는 그렇듯 행복감으로 남아 있었다. 지금도 생각난다. 마포종점(마포선의 종착역) 근방 한강 백사장에서 새끼 메기를 잡아 고무신 한 짝에 담았다. 마포종점에서 전차에 올랐고 그때 뒤로 펼쳐진 한여름 날 붉은 노을빛에 곱게 물든 애오개의 전찻길 풍경이란. 당시 살던 북아현동 고갯마루는 그 근방이고 고개 밑 굴레방다리(마포로 신촌로 충정로가 만나는 아현동 삼거리)는 내 놀이터였다. 방학 내내 물장구치던 동대문운동장(현재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야외수영장은 예서 충정로 종로를 거쳐 동대문으로 이어지던 전찻길의 다른 한 끝. 그 전차만 타면 나는 창 밖 풍경에 눈과 귀를 빼앗긴 채 연신 두리번댔다.

충정로의 전찻길 주변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변치 않았다. 주한 프랑스대사관(서대문구 합동·1962년)의 하늘로 솟구친 콘크리트 처마지붕도 당시 그대로다. 이게 거장 김중업의 작품임을 안 건 30대가 돼서다. 그 옆 한국 최고(最古)의 충정아파트(1930년대 건축) 역시 여전하다. 근방도 마찬가지다. 열 살 때 첫 영성체를 한 약현성당(중구 중림동), PL480조 원조 곡물로 구운 옥수수빵을 매일 나눠주던 봉래·미동초등학교, 여전한 가구점들과 교회들도. 철거를 하고 있는 서대문고가차도(1971년 개통), 여태 건재한 서소문고가차도(1966년 개통)도 그대로다. 지난해까지는 아현고가차도(1968년 개통)도 있었고.

이 고가차도에 이르면 전차에 대한 소회는 더욱 각별해진다. 서소문 것을 뺀 두 개가 모두 전찻길에 있어서다. 이 고가차도는 경제 개발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외국 정상이 방한하면 감동적인 가두 시민환영대회로 차관(借款)외교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세 고가차도는 외국 정상의 모터케이드(자동차 행렬)를 카퍼레이드가 펼쳐질 시청광장으로 논스톱으로 이끈 애국적인 시설이다. 1966년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 이듬해 하인리히 뤼브케 서독 대통령, 1974년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이 이 길을 달렸다. 허름한 집들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동네를 외국 정상에게 노출하는 것이 불편했을 법도 한데, 유독 이곳에 ‘첨단’의 고가차도를 세 개씩이나 만든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렵다.

세상은 돌고 돈다. 전찻길 뜯긴 자리에 고가도로가 놓이더니만 이번엔 그걸 철거해 옛 모습을 되찾는다. 더불어 오십 후반 이 서울토박이에겐 잊혀졌던 기억을, 1000만 시민에겐 애초의 민낯을 보여준다. 이런 과정을 통해 파괴와 창조가 다르지 않음도 깨친다. 그래서 제안하건대 그 자리에 전찻길을 다시 놓으면 어떨지. 뉴질랜드의 크라이스트처치, 프랑스의 몽펠리에처럼. 충정로 마포로 신촌로 종로에 다시 전차가 달린다면…. 노면전차가 유유히 도심을 가르면 이 멋없는 도시도 느림의 미학으로 아름답게 재탄생할 수도 있을 듯해서다.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암살#콩나물버스#노면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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