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특집 커버스토리]내 기억 속의 잊지 못할 외식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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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앞에 놓여있던 행복 한그릇… 고난 이겨낸 힘”

《 가족들이 대화를 나누기에 식사 자리만 한 게 없다. 함께 수저를 들며 나누는 학교, 직장, 친구 얘기가 가족을 이어주는 끈이 되곤 한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가족들이 함께하는 식사 자리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가 올해 초 발표한 ‘2013년 국민건강통계’에 따르면 평일 5일 중 2일 이상 가족과 함께 아침식사를 한 비율은 응답자의 46.1%에 그쳤다.

이처럼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은 요즘. 어릴 적 가족들이 함께했던 식사 자리가 더 각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흔치 않았던 외식의 기억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곤 한다. 누군가에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또는 부모에 대한 사랑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3명이 말하는 ‘내 기억 속의 외식’을 통해 우리에게 외식이 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 “아내가 가르쳐준 인생의 진짜 맛” ▼

박진선 샘표식품 대표이사 사장


어딜 가서 처음 먹는 음식이 있으면 어떨 땐 입에 안 맞아 싫을 때가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음식을 맛있다고 할 때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대체 사람들이 얘기하는 그 맛있는 맛이 무엇인지 알 때까지 계속 먹어본다. 이런 음식은 두세 번 먹어봐선 잘 모르는데 한 10번쯤 먹으면 왜 맛있는지 이유를 알 때가 있다. 맛있는 걸 알고 먹으면 인생이 즐거워진다.

나에겐 홍어의 맛이 그랬다. 아내의 학회 참석차 전남 목포에 함께 갔을 때였다. 아내는 ‘제대로 된 홍어 맛을 보여주겠다’며 금메달식당이라는 곳에 나를 데려갔다.

사실 나는 부모님의 고향이 이북이라 전라도 음식 같은 남도 음식은 어려서 먹어본 적이 없이 자랐다. 미국 스탠퍼드대에 유학을 가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는데, 아내는 전라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결혼하고 몇 달이 안 돼 아내가 청국장을 끓여 줬는데, 그런 냄새는 난생처음 맡아봤다. 처음엔 먹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내가 차려준 음식이니 꾹 참고 먹었는데, 세 번 정도 먹으니까 그때부터 맛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찾아서 먹는 게 청국장이다.

홍어도 마찬가지였다. 이전에도 홍어를 맛본 적은 있었다. 홍어가 맛있어 죽는 사람이 많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홍어 마니아가 많으니, 홍어를 접할 때마다 온갖 괴로움을 참으면서 계속 먹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아무리 먹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맛이었다. 대체 무슨 맛이 있어서 맛있다고 하나 먹을 때마다 생각해봐도 모르겠는 게 홍어였다. 그러다가 아내와 함께 금메달식당에서 제대로 된 홍어를 맛보게 됐다. 맛의 신세계가 열리는 것 같았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입천장이 다 벗겨지는지도 몰랐을 정도다.

정현종 시인은 ‘방문객’이라는 시에서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맛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아내를 만나서 다양한 맛을 경험했다. 다양한 맛을 아는 것은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매일 라면만 먹어도 사는 데 큰 문제는 없겠지만 인생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누리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금메달식당에서 아내와 함께 맛본 홍어의 맛을 떠올리면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 “부모님은 40년째 그 집 냉면만 고집” ▼

원용주 삼성생명 WM사업부 팀장


데이트를 할 때면 즐겨 찾던 단골집이었다. 오묘한 불빛이 반짝이는 경양식집이 아닌 가건물의 냉면집. 그래도 같이 냉면을 먹으면 몸도 마음도 상쾌해졌다. 그렇게 데이트를 하다가 1975년에 결혼을 했다. 적어도 40년 넘게 발길을 이어온 냉면집은 서울 중구 마른내로의 ‘오장동흥남집’이다.

40년 전 결혼을 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부모님이다. 결혼 전부터 흥남집을 찾은 부모님 덕에 나는 걷지도 못할 때부터 냉면을 먹었으리라. 기억이 나는 건 5세 때부터다. 그때도 지금처럼 냉면을 먹기 위해 사람들이 긴 줄을 서곤 했다. 부모님 옆에 서서 기다릴 때면 주인아주머니는 작은 그릇에 냉면을 담아 와서는 “아이 먼저 먹이라”며 부모님께 건네곤 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아이와 함께 온 손님에게는 늘 그랬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내 딸도 어린이로서의 특혜를 누리고 있다. 어릴 때 나처럼 내 딸도 본인은 기억도 못할 시절부터 흥남집 문턱을 넘곤 했다.

흥남집은 우리 가족에게는 ‘외식 그 자체’였다. 부모님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두 분의 부모님도 자연스레 그 집 냉면 맛에 길들여졌다. 양가 사돈이 함께 냉면집을 찾기도 했다. 나의 친할머니와 내 딸이 함께 간 적도 있다. 흥남집 냉면은 우리 집 4대가 즐기는 음식인 것이다. 외할머니는 생전에 ‘드시고 싶은 음식’을 여쭈면 늘 냉면이라고 하셨다. 장성한 딸과 사위가, 어엿한 사회인이 된 손자가 비싼 걸 사드리고 싶어도 대답은 언제나 냉면이었다.

지금도 1년에 서너 번은 온 가족이 다 함께 흥남집에 간다. 혼자 가는 경우도 한 달에 두 번쯤 된다. 흥남집 냉면은 함흥냉면인데 진한 육수에 더해진 감칠맛이 일품이다. 약간 심심한 맛의 평양냉면보다는 함흥냉면이 나에게는 잘 맞는다.

혼자 먹을 때면, 고기와 회가 함께 들어간 섞임냉면을 하나 시키고 사리와 함께 냉육수를 달라고 해서 먹는다. 비빔냉면과 물냉면을 한 그릇씩 먹는 셈이다. 원래 많이 먹기도 하거니와 추억을 곱씹는 기분으로 많이 먹는 까닭도 있다.

그 냉면에는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부모님의 풋풋했던 시절이, 그리운 할머니의 정이, 이제 쌓이기 시작한 내 딸의 추억이 담겼다.  
▼ “일요일은 3대 가족 14명 외식의 날” ▼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우리 가족에게는 대형마트의 ‘의무 휴업일’만큼이나 강제적인 조항이 있었다. 바로 일요일에 함께 모여 외식을 하는 것이다. 영화 ‘대부’의 돈 콜리오네 가문처럼 우리 식구 14명은 일요일 저녁이 되면 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장소는 그때그때 달랐다. 평소 쉽게 가지 못하는 호텔 식당이나 맛집으로 소문난 곳을 함께 찾았다.

특히 서울 용산구에 있는 한 호텔의 일식당을 자주 찾았다. 서울 한가운데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탁월한 곳이었다. 그런 훌륭한 식당의 정중앙에 있는 긴 식탁을 우리 식구가 점령하곤 했다. 물론 계산은 강제 조항을 만든 부모님이 항상 하셨다.

매주 이렇게 모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모님 두 분, 우리 식구 4명, 남동생 가족 4명, 둘째 남동생 식구 4명 등 총 14명이 같은 식당에 들러 밥을 먹어야 하다 보니 불협화음이 나기도 했다. 게다가 황금 같은 일요일 저녁 시간에 매주 모인다는 것은 국회의원들이 만장일치로 합의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가족 모두가 ‘다음 주에 무슨 핑계로 빠지지∼ 약속 있는데…’라는 ‘동탁이몽(同卓異夢)’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런 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은 매주 모였다. 모임에 빠지면 불호령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1시간이라도 틈을 내 밥이라도 먹고 갔다. 아이들도 이제는 ‘일요일은 외식하는 날’이라는 게 머릿속에 박힌 듯하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최근에는 부모님의 나이가 여든이 훌쩍 넘어 쉽게 모이지 못하고 있다.

외식이라는 건 여럿이 같이 모여 바깥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여럿이’와 ‘바깥’이다. 먹는다는 게 단순히 식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음식의 모양새와 맛, 식당의 분위기 등이 다 식사에 포함되는 것이다. 심지어 식당에서 나오는 음악도 중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맛도 내고 멋도 내는 종합예술이 바로 외식이다.

그런 고도의 복합예술을 우리 식구는 20년이나 넘게 했다. 사실 식구라는 말 자체가 입이 모여 음식을 먹는 것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고 또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요즘은 식구라는 단어를 쓰기가 참 어색해졌을 정도로 함께 모여 밥 먹는 것이 쉽지 않다고들 한다. 그만큼 오랜 시간을 툴툴대면서 함께해온 우리 가족이 기특하기도, 그립기도 하다.

박창규 기자 kyu@donga.com
#외식#기억#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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