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시선/정용석]히틀러, 닉슨, 민주주의 제대로 알고 원용해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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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석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정용석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정치인들은 자기들의 주장이 보다 돋보이고 튀도록 하기 위해 ‘히틀러’ ‘민주주의’ 등 역사적 인물과 용어를 자주 원용한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해 아전인수 격으로 끌어다 붙이는 때가 적지 않다. 정치인으로서 돋보이기보다는 도리어 품격을 스스로 깎아내릴 따름이다. 후진국적 정치문화의 부끄러운 단면이다.

정청래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은 10일 문재인 대표의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참배를 비판하면서 유대인이 “히틀러 묘소에 가서 참배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박 전 대통령을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해 5000만 명의 생명을 희생시켰고 600만 유대인을 학살한 미치광이다. 정 최고위원은 이, 박 전 대통령을 그런 미치광이와 동격시함으로써 균형감각을 잃은 게 아닌가 의심케 했다.

또 정 최고위원은 13일 박근혜 대통령을 재임 중 하야한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비유했다. 그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2심 재판에서 대선 개입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자 박 대통령이 “거짓말을 한 것으로 드러났으니” 거취를 밝히라고 했다. 그는 “닉슨 대통령이 도청장치를 사전에 알고” 있었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하야할 수밖에 없었다”며 박 대통령도 “거짓말”을 했으므로 “하야”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러나 닉슨은 정 최고위원의 주장과는 달리 워터게이트 도청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 그의 죄목은 거짓말보다는 도청 ‘은폐’였다. 닉슨은 도청 사실이 보도되자 철저한 조사 대신 그것을 숨기려 했다는 사실이 백악관 녹음테이프로 폭로돼 탄핵 압력을 받고 사임했다.

이처럼 정 최고위원은 닉슨의 하야 원인부터 사실과 다르게 단정함으로써 자신의 말에 대한 신빙성과 설득력을 잃었다. 정치인은 역사적 사건을 원용할 때 정확한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함부로 꿰맞추면 조소의 대상이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8년 6월 광우병 촛불시위를 보고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며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된 중대 변화”라고 치켜세웠다. 김 전 대통령은 아테네 ‘직접민주주의’를 촛불시위와 같은 시끄러운 시위 정치로 착각한 듯싶다.

아테네 직접민주주의 권력구조는 ‘민회(民會)’ ‘평의회(評議會)’ ‘법원’ 셋으로 나뉘었다. 3권 분립의 원시적 형태였다. 민회는 의회 역할을 했고 시민권을 소유한 20세 이상 남자에게 참가 자격이 주어졌으며 연 10회 정도 열렸다. 이 같은 직접민주주의 도시국가에서는 원활한 소통으로 소란한 시위가 필요치 않았다. 시민들은 민회에 출석해 토론으로 합의점을 도출해냈다. 그런데도 김 전 대통령은 촛불시위를 “아테네 직접민주주의 실현”이라고 찬양했다. 그는 아테네 민주주의를 시위 정치로 잘못 읽었거나 광우병 시위를 찬미하기 위해 촛불시위를 아테네 민주주의라고 견강부회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정치인에게 역사적 사실을 전공 학자처럼 숙지하라고 요구하는 건 무리다. 그러나 정치인은 적어도 역사적 사실만은 사실대로 간파해야 한다. 개인의 정치적 소신과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짜 맞춰서는 안 된다.

정용석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히틀러#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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