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Travel]고양이 마을부터 두 발로 건너는 해협까지… 소박한 재미 넘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11일 03시 00분


코멘트

[조성하 기자의 힐링투어]산큐패스로 떠나는 일본 여행

《 출퇴근을 버스로 한 지도 10년. 이젠 핸들을 잡으면 자동차의 노예가 되는 느낌을 가질 정도로 두 발의 자유로움에 푹 빠져 있다. 내가 일본에서 버스여행을 고집하는 이유도 같다. ‘효율’보다는 ‘가치’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런 말, 기억할 것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여행에서 ‘속도’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속도를 앞세우면 보고 배우고 느끼는 것보다 놓치고 빠뜨리고 지나치는 게 더 많다. 간첩을 수사했던 한 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간첩은 보고 듣고 가진 모든 게 ‘범죄 구성요건’이라고. 여행자에겐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보고 느끼고 체득한 모든 게 ‘행복 구성요건’이라고. 일본의 규슈 북단과 혼슈 남단을 사흘간 버스로 두루 돌아볼 수 있는 산큐패스(SunQ Pass)로 기타큐슈와 시모노세키로 버스여행을 떠난다. 》

고기잡이 나가 텅 빈 아이노시마 섬마을에선 고양이가 주인행세를 한다. 양지녘에서 털고르기 하던 고양이 세 마리가 나를 보자 따라나오더니 이내 길 한가운데에 앉는다. 놀아달라는 눈치인데 보푼 털끝엔 봄기운이 완연하다.
고기잡이 나가 텅 빈 아이노시마 섬마을에선 고양이가 주인행세를 한다. 양지녘에서 털고르기 하던 고양이 세 마리가 나를 보자 따라나오더니 이내 길 한가운데에 앉는다. 놀아달라는 눈치인데 보푼 털끝엔 봄기운이 완연하다.
고양이 섬, 아이노시마

모처럼 찾은 후쿠오카. 영하의 서울과 달리 여긴 영상이다. 따스한 햇볕 아래의 바다는 수면에 아지랑이라도 일 듯 봄기운이 완연하다. 나는 신구초(新宮町)행 시내버스로 도심을 빠져나왔다. 내린 곳은 이케아(IKEA)매장 앞. 교외의 단정한 주택가는 저 멀리 바다(후쿠오카 만)와 마주한다. 그 사이로 바람막이숲이 펼쳐져 있다. 숲 속으로 들어서자 상쾌한 내음에 머리가 맑아진다. 얕은 고개를 넘어 걷기를 10여 분. 널찍한 해변이 눈 안에 들어온다. 평일 오후 해변은 개를 데리고 온 산책객 몇 사람만의 차지. 그 너머로 방파제가 보이는데 여객선을 탈 곳이다. 목적지는 7.5km 해상의 아이노시마(相島)섬. 고양이를 찾아서다.

카타마란(쌍둥이 동체선)이 섬에 닿은 것은 출항 20분 후. 도중의 바다에선 멋진 바위섬이 여행자를 맞는다. 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기암이다. 섬은 작다. 주민이라고 해야 300명 정도. 포구엔 작은 낚싯배만 즐비하다. 주민의 생업은 고기잡이, 특산품은 생선어묵. 그 말에 고양이가 섬에 많은 이유를 깨친다. 생선이다. 어묵은 시장에 내다 팔기엔 상품성이 떨어지고 그렇다고 버리기엔 아까운 잡고기가 원료다. 섬에서 잡히는 건 대개 그런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고양이에게 줘도 아깝지 않을 터. 그러니 고양이가 많을 수밖에. 고양이는 이웃 섬에도 많단다.

섬마을은 아담하다. 집이라곤 포구 주변이 전부일 듯 보인다. 그나마 산자락 아래 포구가의 좁은 평지에 일(一)자로 다닥다닥 붙어 있다. 보기에도 옹색하다. 방문객도 반나절 정도 소일하러온 도심 낚시꾼뿐이다. 가끔 나처럼 고양이를 보러 오는 한가한 여행자도 있다지만…. 마을엔 식당도 하나, 료칸도 하나. 주민에게 고양이를 어디 가면 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미소를 띠며 포구 앞을 가리킨다. 고양이 몇 마리가 그 길이 제 집 마당인 양 어슬렁댄다.

식당은 소박했다. 실내도 음식도 주인장도. 하지만 맛만큼은 화려했다. 가이센(海鮮)짬뽕을 두고 하는 말. 푸짐한 해물에 시원한 국물이 기막히다. 포구 게시판에서 한글을 발견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이노시마에’. 거긴 사연이 있다. 3세기 걸쳐 열두 차례(1607∼1811년)나 이어진 조선통신사의 방문이다. 그들이 빠짐없이 여기에 머문 것이다. 부산을 떠난 일행이 육로여행을 시작하는 곳은 시모노세키. 그 전까지의 뱃길(쓰시마∼오키군도)에서 마지막 경유지가 여기 아이노시마다. 섬엔 통신사의 숙박촌 터가 보존돼 있다.

‘은하철도 999’의 메텔과 테쓰로(오른쪽).
‘은하철도 999’의 메텔과 테쓰로(오른쪽).
만화의 고장, 고쿠라로

이튿날 아침. 후쿠오카 도심 덴진버스센터에서 고쿠라(후쿠오카 현 기타큐슈 시)행 버스에 올랐다. 기타큐슈는 규슈 최북단의 후쿠오카 현에서도 최북단. 거기서도 북쪽 땅 끝이 모지(門司) 항인데 혼슈(일본 열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열도의 중앙을 차지하며 도쿄 오사카 교토 등이 있다) 최남단의 시모노세키 항(야마구치 현)과 마주하고 있다. 뻔히 보이는 이 두 항구 사이는 ‘간몬(關門)’해협. 규슈와 혼슈 두 거대 섬은 해협을 가로지르는 간몬대교와 2개의 간몬터널(해저)로 이어졌다.

세상 여행자는 다 같다. 어딘가 땅 끄트머리만큼은 늘 찾는다는 것이다. 그 점에 기타큐슈는 일거양득의 목적지다. 규슈 최북단과 혼슈 최남단을 동시에 볼 수 있으니. 험한 해협을 걸어서 건너는 특별한 체험까지 보장돼 더더욱 그렇다. 단언컨대 지구상 이런 곳은 다시없다. 유럽 아시아 두 대륙을 잇는 보스포러스 해협(이스탄불)의 해저터널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내가 내린 곳은 고쿠라 역 앞. 역사(驛舍)와 연결된 리가로열호텔(Rhiga Royal Hotel)에 여장을 풀고 1박 2일 일정을 시작했다. 그런데 역사의 육교에서 낯익은 모습의 동상을 본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은하철도 999’의 주인공인 메텔과 테쓰로다. ‘우주해적 캡틴 하록’의 주인공도 있다. 그렇지, 여긴 만화의 도시 고쿠라!

두 작품은 같은 작가의 것이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 일본에 애니메이션 붐을 일으킨 마쓰모토 레이지(1938∼)가 그다. ‘우주전함 야마토’, ‘천년여왕’도 그가 그렸다. 그는 고쿠라에 ‘만화’라는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태어나 자란 곳이 바로 여기 고쿠라여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를 만화 거장으로 이끈 것은 태평양전쟁 패전이다. 미군정 치하에서 10대를 맞은 그는 당시 쏟아져 들어온 미국 문화 중에서도 뽀빠이와 미키마우스 등 만화에 매료됐다. 그게 그를 열다섯에 만화잡지에 데뷔하게 만들었다.

고쿠라에서 만화를 즐기기란 손바닥 뒤집기만큼이나 쉽다. 역 바로 옆에 만화박물관(기타큐슈 망가 뮤지엄)이 있어서다. 거기엔 누워서 뒹굴며 만화를 볼 수 있는 방까지 있다. 만화책도 5만 권이란다. 고쿠라에서 만화는 문화코드다. 역에서 파는 망가 에키벤(만화그림 열차도시락) ‘화수라(花修羅)’와 ‘은하철도 999’를 보자. 화수라는 만화박물관 개관을 기념해 고쿠라 시가 개발한 에키벤. 고쿠라 출신 야마다 게이코의 동명작품에 등장하는 전국시대 무사 캐릭터 그림으로 포장됐다.

로맨틱 항구 ‘모지코 레트로’

규슈에 기찻길이 개통한 것은 1891년 4월 1일. 혼슈 최남단 시모노세키 항과 마주한 규슈 최북단 모지 항(1889년 개항)의 모지코(門司港) 역이 출발점이다. 항구와 철도는 물자수송의 대동맥. 그때나 지금이나 모지 항은 혼슈를 잇는 다리와 터널이름의 ‘간몬’처럼 규슈의 ‘관문’이다. 규슈의 석탄과 곡식이 여길 통해 혼슈와 해외로 수송됐다. 그 철도가 혼슈 것과 연결된 건 해저철도터널 개통(1942년) 덕분. 하지만 철도는 모지코 역이 아니라 새로 만든 모지 역을 통과한다. 모지코 역은 가고시마 혼센(本線)의 출발과 종착역, 모지 역은 혼슈와 규슈를 오가는 산요 신칸센의 통과역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며 모지 항은 환골탈태한다. 일본근대화의 기폭제가 된 개항의 주역 시모노세키와 연락선(1901년)이 오가면서다. 시모노세키에 유입된 서구문물은 모지 항에 물밀 듯 밀려들었다. 그 결과 항구는 일본전통과 서양문화로 뒤섞인다. 르네상스 양식의 목조 모지코 역사(1914년 건축)가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근대화의 상징적 유산이다. 안타까운 건 2012년 보수공사에 들어가며 장막으로 가려 놓아 당분간은 볼 수 없다는 것. 그 시기에 지어진 옛 모지세관(1912년 건축)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그런 건축유산이 모지 항엔 즐비하다. 이게 개화기의 분위기를 찾는 사람들을 항구로 불러들인다. 이곳이 ‘모지코 레트로(Retro·복고주의를 뜻하는 말)’라고 불리게 된 배경이다. 샌프란시스코의 관광명소 ‘39번 부두(Pier39)’를 본떠 쇼핑과 산책의 거리로 조성됐다. 배가 드나들도록 상판을 양쪽에서 들어올리는 도개교 ‘블루윙 모지(Blue Wing Moji·108m)’도 볼거리다.

규슈와 혼슈를 잇는 간몬대교. 건너편이 야마구치 현(규슈).
규슈와 혼슈를 잇는 간몬대교. 건너편이 야마구치 현(규슈).
해협을 걸어서 건너다

모지 항에서 간몬 연락선을 타고 야마구치현의 시모노세키 항으로 건너갔다. 소요시간은 10분. 시모노세키 항은 한산했다. 수산물 경매가 끝난 오후라 부둣가 식당밖에 문을 열지 않은 탓이다. 그 식당가는 이곳 특산 복어를 알리는 홍보물로 가득했다. 부둣가엔 초대형 복어 형상 기념탑까지 있다.

항구를 벗어나 간몬대교를 향해 걸었다. 해저터널은 자동차전용인 간몬대교 아래를 통과한다. 해협의 폭은 700∼800m로 아주 좁아 보였다. 그러다 보니 물살은 엄청나게 세다. 여길 하루 700척 이상의 선박이 통과한단다. 그 바닷가에 알파벳 E와 W가 교차하는 대형전광판이 보인다. 조류의 방향(E는 동쪽, W는 서쪽)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빠른 물살이 그 방향을 하루 네 번이나 바꾸다보니 항행선박의 안전을 위해 조류방향을 확인시켜 주는 시설이다.

해저터널은 2개다. 도로와 도보겸용(1958년 개통), 철도전용(1942년 개통)이다. 걸어서 건너려면 원통형 겸용터널 내부의 도로 밑에 있는 도보터널(780m)을 이용한다. 터널의 입구는 바닷가 길가에서 보인다. 그런데 터널에 들어가 보니 이용객 대부분은 운동을 나온 주민들이었다. 날씨에 구애받지 않아 걷고 뛰기에 그만이니 그럴 만했다. 터널은 슬슬 걸어도 15분 정도면 통과한다. 해협을 걸어서 건너는 것, 여행자에게는 아주 특별한 체험이다.

석회암 동굴로는 동양 최대 규모라는 아키요시도(야마구치 현). 산큐패스로 갈 수 있다.
석회암 동굴로는 동양 최대 규모라는 아키요시도(야마구치 현). 산큐패스로 갈 수 있다.
동양 최대 동굴 아키요시도를 찾아서

이튿날 미네 시 아키요시도(秋芳洞)를 향해 버스여행을 시작했다. 산큐패스의 기타큐슈 3일권은 특별하게도 ‘시모노세키’를 포함한다. 그런데 놀란 건 시모노세키 항에서 두 시간 거리의 아키요시도까지 적용되는 것이다. 이곳에는 우리의 삼척마냥 거대한 석회암 산악과 동굴을 포함해 교과서에 등장하는 다양한 석회암 지형을 두루 감상할 수 있는 멋진 자연이 있다. 동굴은 10km나 되지만 공개구간은 1km. 국내동굴의 몇 배 규모다.

Travel Info▼

산큐패스(SunQ Pass):
규슈 전역과 시모노세키(야마구치 현)에서 버스(51개 회사 2400개 노선)와 배(세 항로), 철도(일부)를 제한 없이 이용할 수 있는 버스카드. 규슈 전체(3·4일권), 북부 규슈(3일권·후쿠오카 사가 나가사키 오이타 구마모토 등 5개 현) 3종이 있다. 가격은 각각 1만4000엔, 1만 엔, 6000엔. 규슈투어(www.kyushutour.co.kr) 등 국내여행사에서 할인 판매 중. ◇특징 △이용법: 산큐패스 스티커가 붙은 버스는 모두 탑승 가능. 탈 때 정리권을 뽑고 내릴 때는 정리권을 함에 넣고 패스를 보여주면 된다. 고속버스(일부 노선)는 전화로 좌석을 예약한다. 이때 통역서비스도 제공. △규슈다비(http://kyushutabi.net): 산큐패스와 이걸 이용한 규슈여행에 관한 상세한 정보가 담긴 블록. 다양한 이벤트도 펼치고 있다.

야키카레: 1950년대 개발된 모지 항 명물. 카레라이스 위에 계란과 치즈를 뿌리고 라자니아처럼 오븐에 구워낸다. 모지 항에 전문식당이 21곳 있는데 공식지도까지 만들어 홍보하고 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곳은 모지코 역 앞의 ‘베어프루츠(Bear Fruits)’카페. 샐러드를 곁들인 A세트가 1250엔이다. 연중무휴(오전 10시∼오후 11시)로 주말엔 한 시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오후 3, 4시에 가면 한가하다.

후쿠오카현·야마구치현(일본)=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