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90>그가 복숭아를 보내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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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복숭아를 보내왔다
―박정남 (1951∼)

상자를 여니 복숭아 내음이 진동했다
상자 안에 꽁꽁 묶여 있던 단 내음이
‘좋아라’ 하고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도실도실(桃實桃實) 토실토실 분홍 볼
복숭아들이 즐겁게 뛰쳐나왔다

피서 대신 그가 농사짓는 복숭아밭에 갔다
매미가 쨍쨍 우는 한여름
천막 안에 세워둔 선풍기가 팽팽 돌아가고
가뭄에 복숭아밭에 물을 대고 있던 그가
저벅저벅 장화를 신고 걸어왔다
그의 등 뒤로 하늘의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고
그가 골라 건네주는 복숭아는 구름 위에 앉아 먹는
신선의 음식, 손으로 껍질을 벗겨 먹는 백도를
우리는 물복숭아라 불렀다

입에서 살살 녹아 온몸으로 퍼져 들어가는
분홍 향기는 마침내 사람의 몸에까지
복숭아 향기를 뿜어내게 하는 마력을 지녀
우리는 짐승처럼 끙끙 그의 젖은
러닝셔츠의 땀 냄새부터 맡았다
물컹 복숭아 단 내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하루 시작은 복숭아 세 개를
껍질째 아작아작 베어 먹는 것

그가 귀농해서 삼복염천을
복숭아 알레르기 속에서 일할 때
그의 많은 친인척들은 그가 보내온 복숭아
상자를 앞에 두고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도실도실(桃實桃實) 토실토실 분홍 볼’, 복숭아는 건강하고 젊은 여인의 보조개 팬 볼인 듯 엉덩이인 듯 육감적이다. 그 뽀얀 빛이며 우아한 둥,이라니. 얇은 껍질 속에 향기롭고 단 과육이 가득하다. 누가 복숭아를 마다하랴! 화자는 복숭아 한 상자를 배달받고 멍하니 앉아 있다. 상자를 열자 진동하는 복숭아 향기 속에서 보내준 이의 ‘젖은 러닝셔츠의 땀 냄새’를 떠올리는 것이다. 그가 ‘삼복염천을/복숭아 알레르기 속에서’ 땀 흘려 거둔 복숭아다. 얼마나 귀하고 황송한가. 그는 원래 농부도 아니고 귀농한 이다. 낯선 땅에서 서툴러 더욱 힘들었을 농사를 생각하면 속이 상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다행히도 그는 ‘복숭아 세 개를/껍질째 아작아작 베어 먹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니, 복숭아에 알레르기는 있지만 좋아하나 보다. 십여 년 전 귀농한 선배 생각이 난다. 출판업을 접고 끊었던 소식을 3년 만에 주셨다. 밀짚모자를 쓰고 꺼먼 고무장화를 신은 선배가 미소 지으며 저벅저벅 걸어왔다. 선배가 ‘골라 건네주는’ 가장 크고 맛있는 복숭아를 원도 없이 먹었는데, 그가 정착하기까지 혼자 견딘 3년 고생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선배, 복숭아는 맛있었어요. 늘 고맙고 죄송해요….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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