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속앓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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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2010년 영화 ‘만추’에서 감독과 배우로 만난 김태용과 탕웨이의 결혼 소식이 화제다. 중국 언론은 탕웨이 기사를 연일 보도하며 ‘탕웨이앓이’에 빠졌다는 소식이다.

요즘 누군가를, 아니면 뭔가를 ‘앓는’ 사람들이 많다. 엑소앓이, 수지앓이에 별그대앓이도 있다. ○○앓이라 하면 ○○를 좋아해서 거기에 푹 빠진다는 뜻이다. 많이 쓰긴 하지만 그리 오래된 말은 아니다. 예전부터 쓰던 ‘∼앓이’는 어떨까.

‘…살다 남은 시간을 쪼개고/찬 손을 비비고/싱크대 속에 갇혀 몇 년째 속앓이 한 냄비를 닦고/예리한 어둠에 그을린 낯선 도시를 헹구며…’(김지희 ‘가을, 낯선 도시를 헹구다’)

‘정부가 쌀 개방 문제를 놓고 국내 농민과 국제적 압력 사이에서 속앓이를 하고 있다.’

속앓이를 예로 들어봤다. 앞의 것은 부엌의 노동에 가족애가 담겨 있음을 오래된 냄비를 통해 표현한 시다. 뒤의 것은 남모르게 고민하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속앓이, 써서는 안 되는 비표준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표준어는 ‘속병’이다.

하지만 위 두 문장의 속앓이를 속병으로 고친다면 말맛은커녕 얼토당토않은 문장이 되고 만다. ‘가슴앓이’ ‘배앓이’ ‘이앓이’는 표제어인데, 속앓이가 비표준어인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속병의 사전적 의미는 몸속의 모든 병, 위장병, 화가 나거나 속이 상하여 생긴 마음의 심한 아픔 등을 뜻하는데 속앓이의 뜻이나 용도와는 거리가 멀다. 속앓이를 속병으로 고치라는 것은 ‘마실’은 사투리이니 ‘마을’로 바꾸라는 것과 같다. 이웃 간의 훈훈하고 정겨운 교류를 뜻하는 마실을 어찌 마을이 대신할 수 있겠는가.

두 낱말은 표준어와 비표준어의 대립으로 볼 게 아니다. 비슷하지만 쓰임새와 말맛이 전혀 다르니 둘 다 표제어로 하면 될 일이다. ‘눈꼬리’와 ‘눈초리’, ‘냄새’와 ‘내음’을 복수표준어로 만든 것도 바로 언중이다.

우리가 ‘자장면’이 아니라 ‘짜장면’이라고 마음껏 말하고 쓸 수 있게 된 날을 기억하시는지. 2011년 8월 31일, 국립국어원은 경직된 어문규범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던 ‘짜장면’을 비롯해 먹거리(먹을거리) 손주(손자) 등 39개 단어를 새롭게 표준어로 인정했다. 표준어를 쓰는 것도 언중이고, 표준어를 만드는 것도 결국은 언중이다. 딱딱한 사전이 언중의 ‘속앓이’를 외면해선 안 될 것이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앓이#속병#복수표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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