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동 꺼! 반칙운전]“불편해도 안전 우선” 시민들이 아이 뛰노는 도로 만들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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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집 앞 교통안전, 해외선 어떻게]<1> 네덜란드 델프트市의 ‘보너르프’

네덜란드의 델프트 시내 람스트랏 거리에서 3월 29일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있다. 이곳은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주거지역 도로 형태인 ‘보너르프’ 구역으로 차량속도를 제한해 모든 교통수단 이용자들이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다. 오른쪽 상단에 이곳이 보너르프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델프트=주애진 기자 jaj@donga.com
네덜란드의 델프트 시내 람스트랏 거리에서 3월 29일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있다. 이곳은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주거지역 도로 형태인 ‘보너르프’ 구역으로 차량속도를 제한해 모든 교통수단 이용자들이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다. 오른쪽 상단에 이곳이 보너르프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델프트=주애진 기자 jaj@donga.com
《 네덜란드 헤이그에 인접한 델프트 시의 중앙역 서쪽 주택가 람스트랏 거리 입구. 아스팔트 도로가 끝나고 2, 3cm 높이의 과속방지용 스피드범프 너머 네모난 벽돌로 바닥이 포장된 거리가 펼쳐졌다. 한산한 거리에 드문드문 자동차가 주차돼 있다. 너비 약 2m의 거리가 한층 더 좁아 보였다. 양쪽으로 늘어선 2, 3층짜리 집들은 마당이 없어 출입문을 열면 바로 거리로 이어졌다. 얼핏 보기에 평범한 주택가 이면도로 같았다. 입구에 세워진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파란 바탕에 하얀색으로 공을 차는 어린이, 자동차, 집 등이 그려져 있다. 이곳부터 ‘보너르프(Woonerf)’가 시작된다는 걸 알리는 표지판이다. 》

○ 집 앞에서만큼은 보행자에 우선권

보너르프는 네덜란드어로 ‘생활의 터전(residential yard)’이라는 뜻이다.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주거지역 도로 형태로 1960년대 델프트 시에서 처음 도입됐다. 보너르프가 시작되고 끝나는 곳에는 이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이곳에서는 보행자가 자동차나 자전거에 대해 통행우선권을 갖는다. 자동차는 시속 15km 이하로 서행해야 한다. 교통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주거지역에서 차량의 통행을 최대한 제한해 보행자를 보호하자는 취지다.

3월 29일 찾아간 람스트랏 일대의 보너르프 구역에서는 주민들이 여유롭게 걸어 다녔다. 단을 높여 만든 좁은 인도가 있었지만 주민들은 개의치 않고 도로 가운데로 다녔다. 고무공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차량이 천천히 다녀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한 블록이 끝나고 길이 교차하는 지점마다 스피드범프가 설치돼 있었다. 바닥 재질도 속도를 내기 쉬운 아스팔트 대신 벽돌이다. 이곳에 사는 카일레이흐 스미트 씨(27·여)는 “집 문을 열면 바로 도로라서 차량의 속도가 높으면 위험하다. 주차공간이 부족해 불편하긴 하지만 위험하지 않아 좋다”고 말했다.

보행자와 차량을 분리하는 기존의 도로 개념에서 벗어난 점은 보너르프의 가장 큰 특징이다. 보행자가 차량, 자전거, 이륜차 등 다양한 교통수단과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한 것. 차선이나 연석이 없는 이유다. 동행한 한국교통연구원 이지선 박사는 “보너르프는 보행자와 차량의 통행은 물론이고 주민들의 친교와 어린이들의 놀이공간까지 고려한 복합기능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운전자가 스스로 속도를 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이 보너르프의 핵심이다,

○ 시민이 앞장선 교통안전

보너르프는 델프트 시민들로부터 시작됐다. 1960년대 자동차가 증가하면서 이로 인한 사고나 사상자도 늘어났다. 특히 아이들의 안전을 우려한 시민들은 차량의 통행을 제한해서라도 ‘내 집 앞 안전’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택가 도로의 경계에 화분이나 꽃바구니가 하나둘 놓이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도로로 진입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운전자들도 주민들의 뜻을 존중했다.

시민들의 바람을 확인한 델프트 시청은 도시설계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보너르프를 처음 도입했다. 시민들의 반응이 좋아 시내 보너르프 구역이 하나둘 늘어갔다. 델프트 시의 성공을 본 다른 지방정부들도 동참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1976년 보너르프를 법제화하고 적극적으로 도입에 나섰다. 해당 구역에서 △보행자는 통행이나 놀이를 할 때 도로 전체를 이용할 수 있고 △차량은 보행속도(시속 15km)를 초과해 달릴 수 없고 △주차는 지정된 장소에서만 허용한다는 내용의 규정도 도로교통법에 명시했다. 2009년 기준으로 네덜란드의 주거지역 도로 7만2643km 가운데 893km(1.2%)가 보너르프다.

보행자와 차량이 공존하는 선진국형 완전도로(Complete Streets)의 시초인 보너르프는 1980년대 영국의 홈존(Home Zone), 일본의 커뮤니티존(Community Zone) 등 다양한 형태로 외국에 도입됐다.

○ “시민 스스로 불편 감수하는 게 성공비결”

네덜란드 정부는 1990년대 새로운 도로관리정책을 수립했다. 전체 도로의 통일성 있는 관리를 위해 도로를 △시속 30km △시속 50km △시속 70km 이상 등 세 가지로 단순화한 것. 주거지역은 대부분 시속 30km 제한구역(Zone30)에 속한다. 현재 네덜란드에는 보너르프보다 Zone30이 더 많다. 새 정책에 따라 기존의 보너르프를 Zone30으로 바꾸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기존의 보너르프를 고집했다.

델프트 시청의 마이커 코네인 교통·공간활용 담당자는 “최대한 주민 요구를 수용하면서 운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시민들도 불편을 감수하면서 안전을 지키려는 의지를 잃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델프트=주애진 기자 jaj@donga.com
#네델란드 델프트#보너르프#커뮤니티존#홈존#완전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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