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26>가장의 체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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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의 체면
―김종목(1938∼ )

가만히 누워 있어도 욕먹는 세상이다
무언가 몸을 움직여 돈푼이라도 벌어 와서
식솔들의 목구멍에 밥이라도 떠 먹여야 할 텐데
꿈이나 잔뜩 베갯머리에 쌓아놓고 누웠으면
돈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마누라 잔소리가 바가지로 쏟아지고
아이들의 눈빛이 번쩍번쩍 칼날이다
가장은 잠시도 등 붙이고 누워 있으면 안 된다
죽자 사자 일어나서 움직여야 하고
몸이 가루가 될지라도 돈을 벌어 와야 가장이 된다
가만히 있으면 가장에서 밀려나고
남편이나 아버지라는 이름도 위태위태해진다
발바닥이 불바닥이 되도록 움직여야 하고
체면이고 위신이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돈을 향해 하이에나처럼 돌진해야 한다
그리하여 푸른 배춧잎을 물고 와 방바닥에
주르륵 쏟아 놓고 그 위에 누워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가장의 체면이 서고
남편과 아버지의 끗발이 선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욕을 먹지 않으려면
돈 냄새 풀풀 나는 배춧잎 위에
떡하니 누워 있어야 한다

“여보, 당신은 시 쓰는 몸이시잖아요. 돈은 제가 벌어 올게요. 당신은 살림 걱정 마시고 시에만 정진하시와요.” 이런 아내라면 작히 좋으랴만, 시상(詩想)을 궁굴리느라 좀 누워 있으면 ‘돈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잔소리가 바가지로 쏟아진다. 생활비가 간당간당한데 남편이 돈도 안 되는 ‘꿈이나 잔뜩 베갯머리에 쌓아놓고’ 누웠으니 속이 터지는 것이다. 자격지심인지 몰라도, 아이들의 눈빛도 곱지 않게 느껴진다. 아, 그놈의 돈! ‘푸른 배춧잎을 물고 와 방바닥에 주르륵 쏟아’ 놔야 ‘남편과 아버지의 끗발이’ 서는데, 베스트셀러 시집은 하늘이 내는 거고, ‘발바닥이 불바닥이 되도록 움직여야’, 시인의 ‘체면이고 위신이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하이에나처럼 돌진해야’ 간신히 가장 구실을 할 테다.

그러자면 언제 시를 쓰지? 생활력 있는 아내를 둔 사람이 부럽기도 할 테다만, 결혼할 당시에는 이런 계산 전혀 안 했을 테고, 아내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연애는 짧고 생활은 길고, 예술은 저 너머에 있다. 가난한 가장인 시인은 식구에게 대접 못 받는 생활인으로서의 설움과 막막함을 소탈하게 토로한다. 가족이 자기를 ‘돈 버는 기계’로만 취급하는 것 같을 때 남자는 외롭다.

“네 아버지는 너보다 어릴 때 결혼하고 너를 낳았다. 스물일곱 살, 그 어린 사람한테 돈 벌어오라고, 내 인생을 책임지라고 몰아세운 걸 생각하면, 너무 안됐고 미안하다.” 한 친구가 미혼인 아들에게 했다는 말이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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