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SNS에서는]‘연인’의 실체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8일 03시 00분


코멘트
프로듀서 프라이머리(왼쪽)와 개그맨 박명수가 ‘무한도전 가요제’를 위해 결성한 팀 ‘거머리’.
프로듀서 프라이머리(왼쪽)와 개그맨 박명수가 ‘무한도전 가요제’를 위해 결성한 팀 ‘거머리’.
1980년대 중반, 레코드 가게에 돈을 주면 ‘공테이프’에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해 줬다. 어느 날 카세트테이프를 찾아 온 누나는 ‘전축’에 테이프를 꽂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순간 ‘뿅뿅’하는 경쾌한 전자음이 내 심장을 두드렸다.

“어, 이 노래 뭐야?”

“바람이 불면∼ 외로운 내 마음…” 하는 가사였다. 코흘리개였던 내가 외로움을 알 리가 없었다. 가사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멜로디와 느낌이 좋았다. 누나는 종이에 적은 노래 제목을 보여줬다.

‘내 인생을 찾아서.’

가수 민해경의 신곡이었다. 댄스뮤직, 전자음악이 생소하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트로트, 발라드와는 뭔가 달랐다. 자연스럽게 이후 나는 민해경의 음악에 응원을 보냈다. 어렸지만.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2000년대 중반, 휴가 차 일본 도쿄에 놀러갔다 우연히 헌책방과 중고 음반 가게가 밀집한 진보(神保) 정에 들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낯선 이국땅에서 ‘내 인생을 찾아서’와 똑같은 노래가 들려왔다. 멜로디와 반주는 물론 편곡과 연주 악기까지 똑같았다. 가사만 일본어일 뿐이었다.

중고 음반 가게 점원에게 물었더니 1980년대 일본 여가수 혼다 미나코(本田美奈子)의 음반을 꺼내줬다. 문제의 곡은 1985년 데뷔곡 ‘사쓰이노바캉스(殺意のバカンス)’였다. 도쿄에서 돌아온 나는 서울 명동 지하상가에 있는 중고 음반 가게를 뒤져 ‘내 인생을 찾아서’가 수록된 민해경의 레코드판을 샀다. 1986년 발매된 이 음반의 재킷 어디에도 ‘번안곡’이나 ‘인용’ 같은 문구는 없었다. 작사, 작곡가 모두 한국인이었다.

발표된 지 30년 가까이 돼 가지만 아직도 ‘내 인생을 찾아서’가 혼다 미나코의 노래를 베끼거나, 혹은 ‘참고’했는지에 대한 ‘공식’ 발표 또는 기록은 없다. 중요한 건 그 시절 내가 홀렸던 그 느낌을 ‘멋쩍다’는 감정이 대체했다는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연인의 ‘숨겨진 실체’를 알아버린 느낌이랄까.

멋쩍은 순간은 이후에도 여러 번 있었다. 그룹 ‘룰라’의 3집 음반 타이틀곡 ‘천상유애’가 일본 아이돌 그룹 ‘닌자’의 ‘오마쓰리 닌자(お祭り忍者)’와, 김민종의 발라드곡 ‘귀천도애’가 일본 록 밴드 ‘튜브’의 ‘서머 드림’과 비슷하다는 시비가 일었다. 가수는 활동을 중단했다. 한창 이 노래들과 사랑에 빠져 있던 나는 ‘워크맨’에서 이들의 테이프를 빼내야 할지 빼내지 말아야 할지 내적 갈등을 했었다.

‘숨겨진 실체’가 있는 노래들은 계속 나왔다. 시대별 특징도 있었다. 문제가 된 노래들은 1980∼1990년대에는 주로 일본 음악을, 2000년대 이후엔 미국 팝이나 유럽 일렉트로닉 음악을 모방했다. ‘케이팝’이 인터넷을 타고 세계로 뻗어나가는 최근에는 우리 것을 모방하는 ‘역사례’가 나오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 음악이 발전했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문제는 ‘아직도’라는 것이다. 올해만 해도 힙합 듀오 ‘배치기’의 ‘눈물샤워’부터 로이킴의 ‘봄봄봄’, 아이유의 ‘분홍신’ 등이 표절 시비에 휘말렸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표절에 대한 ‘감시망’은 더 촘촘해졌다. 이번 주 SNS를 뜨겁게 달군 이슈도 프로듀서 프라이머리와 개그맨 박명수의 합작곡 ‘아이 갓 씨’가 네덜란드 출신 재즈 여가수 카로 에메랄트의 노래와 비슷하다는 의혹이다.

하지만 시비를 정확히 가리기란 쉽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명확한 ‘사실’은 없는 것 같다. 의혹에 대해 가수나 작곡가가 해명을 하는 동안 또 다른 노래가 표절 시비로 화제가 된다. 의혹들은 계속 쌓이기만 할 뿐이다. 확실한 건 어제 느꼈던 ‘아이 갓 씨’의 흥겨움을 오늘은 그대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간만에 온 힘을 다해 사랑할 준비가 됐었는데…. 나는 또 한 번 멋쩍었다.

김범석 소비자경제부 기자 bsis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