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70>밤의 공벌레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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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공벌레
―이제니(1972∼)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였다. 한 번으로 부족해 두 번 깜빡였다. 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하염없이 얼음을 지칠 테다. 지칠 때까지 지치고 밥을 먹을 테다. 한 그릇이 부족하면 두 그릇을 먹는다. 해가 떠오른다. 꽃이 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음독의 시간. 지금이 몇 시일까. 왕만두 찐빵이 먹고 싶다. 나발을 불며 지나가는 밤의 공벌레야. 여전히 너도 그늘이구나.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죽었던 나무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알았다. 틀린 맞춤법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부끄러움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화자는 온 힘을 다해 살아본 거다. 그래도 뭐가 안 되니까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하는 걸 테지. 억세게 슬프거나 우울하면 식욕이 뚝 떨어지게 마련이지만, 어떤 이들은 폭식증을 일으킨다. 화자는 기절할 정도로 힘든데 다 잊어버리고 놀겠단다. 그 힘듦, 삶의 얼음판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미끄럼질 치겠단다. ‘지칠 때까지 지치고’, 그리고 밥을 먹겠단다. 두 그릇 세 그릇 먹고 한밤에 폭식을 했으니 속은 더부룩하고 기분은 비참할 테다. 어느덧 해가 떠오른다. 울고 싶어지는데, 그러니까 또 왕만두 찐빵이 먹고 싶단다!

공벌레는 ‘위험을 느끼면 몸을 공처럼 둥글게 마는 야행성 벌레’다. 사람에게 특별히 해를 주지 않으나 생김새가 불쾌감을 준단다. 공벌레 눈에는 사람 생김새가 불쾌할 테다! 기어가는 공벌레를 보고 화자는 제 그늘을, 제 어둠을 응시한다. 삶의 그늘에 저항하는 한 방식이 세련되고 재밌는 시어들로 절절이 그려져 있다. 이제니의 언어 감각은 발군이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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