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58>초저녁 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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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 달
―박형준(1966∼)

내게도 매달릴 수 있는
나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침에는 이슬로
저녁에는 어디 갔다 돌아오는 바람처럼

그러나 때로는
나무가 있어서 빛나고 싶다

석양 속을 날아온 고추잠자리 한 쌍이
허공에서 교미를 하다가 나무에 내려앉듯이

불 속에 서 있는 듯하면서도 타지 않는
화로가의 농담(濃淡)으로 식어간다

내게도 그런 뜨겁지만
한적한 저녁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필 ‘매달릴 수 있는 나무’일까? 왜 나무를 바라보지 않고, 매달리고 싶어 하나? 여기서 나무는 실제 나무가 아니라 아내나 남편, 혹은 늘 한결같은 애인일 테다. 화자가 ‘아침에는 이슬로/저녁에는 어디 갔다 돌아오는 바람처럼’ 매달릴 나무. 화자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 ‘그러나 때로는/나무가 있어서 빛나고 싶다’. 어디 실컷 돌아다니다 와도 늘 그 자리에 있어 언제고 받아 주고 보듬어 주는 나무. 그런 존재가 있다면 등뼈가 쑥 펴지고 힘이 나련만. 내 존재가 환해지고 기가 살련만!

문득 혼자서 우두커니 마당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면 어떤 그리움이 간절해질 때가 있다. 더욱이 석양의 마지막 빛으로 화롯불처럼 열기가 확 퍼지는, 투명하게 붉은 시간. 모든 사물의 윤곽이 선명하고 그 그림자도 진한 시간. 그 속을 한 쌍의 고추잠자리가 짝을 짓고 날아다닌다. 때는 초가을 저녁. 화자는 생각하리라.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제 나이도 젊지 않고…. 이렇게 외로울 수가, 이렇게 쓸쓸할 수가! 내가 스님도 아니고,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아, 나도…. 이 쓸쓸한 사람, 아마도 독신일 화자는 꼭 섹스가 아니더라도 농밀하고 뜨거운, 그런 순간이 간절히 그리운 것이다. 화자의 한숨 소리가 초저녁달에 닿는 듯하네. 빼어난 서정시다. 서정의 왕자, 박형준!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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