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55>물방울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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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오두섭(1955∼)

시작은 모른 채
여기까지 달려온 길
소매 끝 꽉 붙잡았다
숨죽이며 벼랑 떠받는 바람
시간이 잠시 숨쉬기를 멈춘다
더 이상 터질 곳 없는
꽃의 절정인 듯
절체절명인 듯
빌 공!
사이 간!
목까지 올라온 숨
놓치지 않고 머금고 있다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만들고 있는 듯이
깜짝 순!
틈 간!


아, 살 것 같다! 이렇게 보송보송하게 앉아서 인간답게 호흡할 수 있은 지 열흘이 안 된다. 여름의 지옥 같은 터널을 허덕허덕 기어서 지나왔다. 꿈만 같다. 땀도 안 나고 춥지도 않고, 황송할 정도로 쾌적한 날씨다. 지금 이 상태, 이 순간이 ‘꽃의 절정’인 것 같다. 일 년 365일 중 가장 좋은 때! 이제 곧, 난방은 어떻게 하나 걱정하겠지. 그렇게나 인생의 좋은 날은 짧은 거다. 시 ‘물방울’이 진득하게 보여주는 바, 일생이 순간인 물방울처럼!

어느 비 오는 밤, 보안등 불빛 속에 떨어지던 빗방울이 떠오른다. 한 알 한 알 다이아몬드처럼 영롱했지. 시인 오두섭의 물방울은 떨어지는 물방울이 아니라 어디엔가 맺혀 있는 물방울이다. 떨어지고 있든 맺혀 있든 물방울은 아슬아슬하다. 물방울의 표면은 얼마나 연약한가.(표면? 물방울은 겉 다르고 속 다르지 않은데 표면이라니? 물방울의 형상(形狀)을 지탱하는 표면 말이다.) 물방울의 형상을 떠올려 본다. 둥글다는 건 사방이 벼랑이구나! 연약함과 아슬아슬함이 물방울의 견고한 정체성이다.

‘물방울’은 다의적으로 읽힌다. 땀, 이슬, 눈물, 그리고 정액으로도 읽힌다. ‘숨죽이다’ ‘벼랑을 떠받다’ ‘시간이 숨쉬기를 멈춘다’ ‘더 이상 터질 곳 없는’ ‘절정’ ‘절체절명’ ‘목까지 올라온 숨/놓치지 않고 머금고’ 등의 표현들이 어떤 유열(愉悅·희열)의 극치를 향해 숨 가쁘게 치닫는 것 같지 않은가? 물방울, 너무나도 짧은 완벽한 순간!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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