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45>10개의 강아지 인형을 지키는 옷장 속의 인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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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강아지 인형을 지키는 옷장 속의 인간
―박상순(1961∼)

창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가슴에 있네요.

문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발 아래 있네요.

창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등 뒤에 있네요.

문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나는,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나는, 열 개나 있네요.


비 오고 바람 부는 날이다. 보슬보슬 가랑비가 아니라 굵은 비 주룩주룩 쏟아지고 바람도 거셀 테다. 여럿이라면 이런 날씨가 술 마시기 좋은 날이라고 즐거울 수도 있을 테지만, 혼자라면? 더욱이 한밤이라면? 외딴집에서라면? 좀 으스스할 테다.

‘창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화자는 혼자다. 적막하게 창밖을 내다보는데 가슴께 유리창에 아마도 죽은 이일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있다. 한달음에 달려가 문을 여니 비바람 몰아치는 문밖, 발 아래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있다. 3연에서 그 창백한 얼굴은 유리창 안쪽에 화자와 함께, 화자의 등 뒤에 있다. 비유도 뭐도 아니고,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모르겠지만, ‘창백한 얼굴’이 문자 그대로 ‘있는’ 것이다! 으스스하지 않은가? 시 제목부터 으스스하다. 인형이란 문득 무서운 느낌을 주는 사물이다. 그나마 강아지 인형이라 덜 무섭다마는. 강아지 인형을 애지중지하는 어른이란 것도 어딘지 이상하고 슬프고 무섭다. 더욱이 옷장 속이라니! 옷장 속이란 어린 시절에 숨어 있기 좋아 했던 아늑한 공간이면서, 동시에 무언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아 두려웠던 공간 아니던가?

더위 좀 식히자고 ‘공포시’를 찾아봤다. 끔찍한 시, 흉측한 시, 엽기적인 시는 제법 있는데 순수하게 무서운 시는 좀체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하나 지어낼까 하던 차에 박상순의 이 시를 발견했다. 어쩜 이리 산뜻하게 무서울까! 박상순의 장기인 ‘환상’이 ‘공포’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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