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베트남 공산화 후 적화통일 위협 노골화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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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75>베트남 패망

1975년 4월 30일 조국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5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피란민들. 동아일보DB
1975년 4월 30일 조국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5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피란민들. 동아일보DB
중앙정보부는 1975년 3월 19일 김지하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에 구속 송치한다. 2·15조치로 석방된 관련자 중 재구속된 첫 사례였다.

김지하가 다시 감옥에 들어가고 얼마 후인 4월 9일 인혁당 8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이뤄진다. 그리고 이틀 뒤 서울대 농과대 교정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유신헌법 철폐와 박 정권 퇴진” 등의 구호가 터져 나오며 집회가 열리던 중 이 대학 축산과 4학년 김상진이 선언문을 읽고 난 후 20cm가량 길이의 등산용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른 것이었다. 그는 재학 중 입대해 군 복무를 마치고 4학년에 복학한 26세의 청년이었다.

그는 할복 직전 선언문에서 이렇게 외쳤다.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대학은 휴강의 노예가 되고 교수들은 정부의 대변자가 되어가고 우리들은 어미 닭을 잃은 병아리마냥 반응 없는 울부짖음만 토하고 있다.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가고 있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했다. …들으라!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를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김상진은 병원으로 옮겨지는 차 안에서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애원하다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았지만 다음 날 아침 눈을 감는다.

그의 할복자살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널리 알려졌다. 3일 뒤인 4월 12일 서울대 농대는 휴교령을 발표했고 15일 민주회복국민회의도 추도성명을 냈다. 18일에는 명동성당에서 추도미사가 열렸다. 24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도 추모기도회를 열고 ‘김상진 군의 죽음에 답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김지하가 재구속되고 인혁당 관련자들이 사형집행되고 김상진의 할복자살까지 이어지자 대대적인 민주화 시위를 촉발시킬 수 있는 뇌관이 될 것이 뻔했다. 그러나 1975년 4월 한국 사회는 격동하는 국제정세로 다시 공산화의 공포에 휘말리니 바로 베트남과 캄보디아 공산화에 따른 것이었다.

캄보디아는 1975년 4월 17일 급진 공산주의 운동단체인 크메르루주가 수도 프놈펜을 함락하며 공산군에 장악된다. 70년 3월 론 놀 장군이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친미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바로 크메르루주군과의 내전에 돌입해 전체 국민의 10%에 가까운 70여만 명이 숨지는 피의 전쟁을 벌인 것. 하지만 결국 정부군이 백기를 들고 론 놀은 하와이로 망명하면서 공산화됐다.

캄보디아 공산화 소식이 알려진 직후 이보다 더 큰 충격적인 소식이 알려지니 바로 4월 30일 베트남의 공산화였다. 이곳에 군대를 파병한 한국으로서는 남의 일 같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베트남이 미군 철수 이후 내부 분열로 망해가는 과정이 언론을 통해 매일 생중계되면서 국민들은 대한민국도 어느 날 갑자기 적화통일되지 않을까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줄을 이어 피란을 가는 베트남 국민들의 참혹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 국민들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6·25를 떠올렸다. 신문들은 연일 대문짝만 하게 혼란에 빠진 베트남 상황을 전했다.

1975년 4월 30일 밤, 베트남 공산군 탱크가 사이공의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 철문을 부수고 들어가 깃발을 올리고 있었던 시간에 박정희 대통령은 비장한 심정으로 이렇게 일기를 쓴다.

‘참으로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우리 젊은이 30만 명이 파병해 8년간이나 싸워서 월남 국민들을 도왔다. 이제 그 나라는 멸망하고 월남공화국이란 이름은 지도상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자기 나라를 자기들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와 힘이 없는 나라는 생존하지 못한다는 엄연하고도 냉혹한 현실과 진리를 보았다. 남이 도와주려니 믿고 나라 지키겠다는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망국의 비애를 겪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 눈으로 보았다. …이 강산은 조상들이 과거 수천 년 동안 영고성쇠를 다 겪으면서 지켜오며 이룩한 조상의 나라다. 영원히, 영원히 이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켜가야 한다.’

이 같은 정세 속에서 김일성의 공세는 날이 갈수록 기고만장해졌다.

그는 75년 4월 18일 14년 만에 중국 당과 정부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해 덩샤오핑을 만나 국제사회를 떠들썩하게 한다.

김일성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이 공산군에 함락된 직후인 4월 19일 베이징에서 열린 환영 연설에서 “만일 남조선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단일민족이면서 같은 민족으로서 팔짱을 끼고 있지 않고 남조선 인민을 적극 돕겠다. 만일 적들이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키면 단호하게 전쟁으로 대답하겠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이요, 얻을 것은 조국의 통일”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한 달 전 2차 땅굴 발견으로 북한의 기습을 현실로 느끼게 된 국민들로서는 그의 말이 단순한 엄포로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김일성은 처음엔 ‘4월 16일 방중’으로 발표했다가 ‘18일 방중’으로 바꿨는데 일부러 프놈펜 함락에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풀이됐다.

어떻든 75년 상반기 한국 사회에는 서울을 사수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대대적인 반공 분위기가 지배했다. 정부는 전국에서 안보궐기대회를 열어 학생과 시민을 동원했다. 전국 주요 거리와 관공서 건물에는 ‘총력안보’ 구호가 내걸렸다.

마침내 박 대통령은 김일성의 엄포 한 달이 채 안 된 5월 13일 긴급조치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다. 긴급조치 9호는 79년 10·26까지 4년 6개월간이나 지속되면서 총 800여 명이라는 구속자를 낳은 대기록(?)을 세운다.

김지하 본인은 물론이요, 가족들까지 “이번에는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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